냄비밥을 해 먹어 본 사람은 안다
쌀을 물에 즐겁게 불리는 일부터
냄비에서 밥물이 끓는 절정의 찰나를
긴장 놓치지 않고 기다릴 때까지
이건 물과 불과 시간을 아는 일이며
이건 마음을 아는 일이라는 것을
센 불로 끓이고 중불로 익히고 약한 불로 뜸들이며
냄비 속의 물이 넘쳐 불을 다치지 않게
불 위의 냄비가 뜨거워져 쌀을 다치지 않게
쌀과 불과 물이 평화롭게 하나 되어
사람이 먹는 한 그릇의 더운밥이 되는 일이란
이건 세상만사와의 집중이며
이건 우주와의 화해다, 라고
그래서 원터치 전기밥솥의 디지털 밥을 먹는 사람은
이 고슬고슬한 아날로그 밥맛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냄비밥 뜸 들기를 기다리며 나는 행복해진다
(정일근·시인, 1958-)
+ 장날
장꾼들이
점심때 좌판 옆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니
그 주변이 둥그렇고
따뜻합니다
(안도현·시인, 1961-)
+ 그 밥집
뜨끈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중앙시장 그 밥집
어물전 아줌마도 수선집 아저씨고 먹고 가는 그 밥집
누구 하나 밥 한 톨 안 남기고 반찬 투정 한번 부리지 않는 그 밥집
그 밥집 밥 먹고 난 뒤에는 노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을 그 밥집
(안도현·시인, 1961-)
+ 어린 시절의 밥상 풍경
아버지는 언제나 저녁을 드시고 오셨다.
보리와 고구마가 쌀보다 더 많았던 저녁밥을
밥그릇도 없이 한 양푼 가득 담아 식구들은 정신없이
숟가락질을 하다가도 조금씩 바닥이 보일라치면
큰형부터 차례로 수저를 놓았고 한두 알 남은
고구마는 언제나 막내인 내 차지였다.
(여림·시인, 1966-)
+ 밥알 하나
할머니한테 들은 고조할아버지 이야기
얼마나 가뭄이 지독했던지 먹을 게 없었다
어느 날 마루에 놓인 물동이 속에
밥알 하나 가라앉은 게 보였다
가난해도 양반 체면에
밥알 하나만 달랑 건져 먹는 건 욕이 될까 봐
물 한 동이를 통째 들이키셨다는,
목까지 차오르는 물 속에
밥알 하나 가만히 떠올라 오는 이야기
(이안·시인, 1967-)
+ 밥 한 그릇
밥 한 그릇을
나물 양푼에 붓고
비벼서 같이 먹는 날
엄마가 먼저
숟가락 놓고
누나는 엄마 모르게
날 쿡쿡 찌르다가 숟가락 놓고
난 엄마하고 누나하고
좀 더 먹으라고 숟가락 놓고
우리 세 식구 먹고도
밥 한 그릇이 남았다
배는 고파도
마음이 부른 날
(안영선·아동문학가, 경북 의성 출생)
+ 혼자 먹는 밥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生(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송수권·시인, 1940-)
+ 밥
결혼하고 살면서 밥먹듯이 듣고 사는 말,
밥!
아이 하나 둘 생기면서
엄마 다음으로 자주 듣고 사는 말,
한 번쯤 건너뛰어도 될 만한 때도 어김없이
내 뒤통수에다 대고
밥!
때로는 엄마는 거두절미하고
'엄마=밥'으로 통하는 동의이의어
나를 옭아매는 지긋지긋한 쇠힘줄 같은
나만 보면, 밥! 밥! 밥! 밥!
그래, 알고 보면 나는 너희들 밥줄이지
탯줄 끝에 붙어있던 너희들 밥이었지
친정 엄마 만나면 밥 생각부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버릇
나도 부인 못하지
누대에 걸친 아슴아슴한 탯줄의 기억이
입안 깊숙이 숟가락 바통 물려주는
뜨끈뜨끈한 계보
밥!
(김나영·시인, 1961-)
+ 밥상
산 자(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상 위에 놓이는 수저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는가
아침마다 사람들은 문 밖에서 깨어나
풀잎들에게 맡겨둔 햇볕을 되찾아 오지만
이미 초록이 마셔버린 오전의 햇살을 빼앗을 수 없어
아낙들은 끼니마다 도마 위에 풀뿌리를 자른다
청과(靑果) 시장에 쏟아진 여름이 다발로 묶여와
풋나물 무치는 주부들의 손에서 베어지는 여름
채근(採根)의 저 아름다운 殺生으로 사람들은 오늘도
저녁으로 걸어가고
푸른 시금치 몇 잎으로 싱싱해진 밤을
아이들 이름 불러 처마 아래 눕힌다
아무것도 탓하지 않고 全身을 내려놓은 빗방울처럼
주홍빛 가슴을 지닌 사람에게는 未完이 슬픔이 될 순 없다
산 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솥에 물 끓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 또 있겠는가
(이기철·시인, 1943-)
+ 신성한 식사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1)
마른 무 쪼가리 콩자반에 김치
할머니 진지를 드시네
나물 싸주던 흙손으로
돈을 세던 갈퀴손으로 김치를 쭉 찢어
눈감고 한입 밀어 넣으시네
눈곱 낀, 한쪽은 반쯤 감긴 눈
두 개 남은 앞니로
오물오물 꿀~꺽
식사를 하시네
낮술 취한 망나니 아들이 건들건들
이 할망구 뒈져 죽어 버려라 해도,
할머니 대꾸도 않고 콧물 쓰윽
검지 손께로 훔치며 식사를 하시네
남은 좌판에는 머위대, 헝클어진 돌나물, 고들빼기
오가는 행인들의 투박한 발걸음마다
보풀거리며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할머니 웃뜸 마실 가듯 천천히 늦은 점심을 드시네
(이지엽·시인, 1958-)
+ 저녁식사 풍경
어금니 반쯤은 빠지고
남은 이도 흔들리기 때문에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와드득
깨물어 먹지 못하는 아버지
맛있는데 맛있는 건데
허탈하게 말하며, 그 총각무같이
씁쓸한 웃음을
흐흐흐 흐흐흐
며느리는 총각김치를 맛있게 먹다가
잠시 입맛을 잃었고
아버지는 왜 안 먹냐며
자꾸 권했다
맛있어, 먹어봐 먹어
흐흐흐 흐흐흐
우린 간신히 밥숟가락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음식의 氣만 빨아먹는 귀신같이
헛것을 먹고 있는 아버지의 웃음
어느새 그에게도 죽음의 힘이 스몄구나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아무도 우겨넣은 밥을 넘기지 못했다
(이진우·시인, 1965-)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
공사장 밥집에서
밥 몇 끼 먹은 적 있다
땡볕에 무쇠덩어리 들고 다니면서
한 바가지 땀 흘리고 먹은 밥이다
허공에 발판 딛고 서서
얼음바람에 동상 걸린 얼굴로 먹은 밥이다
어두컴컴한 동굴바닥에서
풋고추에 고추장 듬뿍 찍어 먹은 밥이다
공기 두 그릇과
양파에 깍두기 한 보시기면 그만인 밥이다
젓가락도 쓰지 않고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뚝빼기째로 들고마신 밥이다
땀 흘렸던 시간이 반찬이었으니
밥맛을 돋구고 숟가락질을 만든다.
노동으로 허리가 오그라지려고 하다가도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꼿꼿하게 펴지는 것이니
꿀맛 같은 밥이다
밥 먹고 그늘 속에 들어가
바닥에 빈 박스 하나 깔고
고린내 나는 신발 베고 잘 수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고두밥 진밥
밥을 먹다가 문득
내가 진밥을 닮아 간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적 어머니는 아버지의 입맛에 따라
진밥을 지었다
씹힐 때 고소하게 우러나오는 고두밥의 맛과는 달리
숟가락에 질척질척 매달리며
목구멍을 은근슬쩍 넘어가는 진밥이 나는 싫었다
숟가락으로 푹푹, 진밥에 화풀이를 해댔다
유별난 철부지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눅눅하지 못하고
곤두선 고두밥알처럼 튀어나가기 일쑤였다
거센 세월의 비바람이 나를 지나갈 때마다
내 고슬고슬한 고두밥은
꼿꼿한 관절을 풀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눅눅한 진밥으로 돌아앉았다
밥은 나를 만만히 본 것인지
언제나 생각대로 지어지지 않아
때론 진밥 선밥 죽밥 삼층밥 고두밥 생밥의
각기 다른 개성으로 태어난다
진밥은 그냥 먹지만 성미 까칠한 밥은
다시 물을 부어 강한 불로 주물러서
뼈대가 흐물흐물해지면 휘휘, 저어 먹는다
(김진기·시인, 1937-)
+ 밥
건너편 공사장
건물외벽에 매달린
한 남자
하얀 페인트를 뿜어낼 때마다
아카시아 꽃이 피어난다.
중력을 무시한 채
가느다란 밥줄에 매달려
종일 페인트를 뿜어대다
건물 불이 꺼진 후에야
얼굴에 묻은 꽃가루를
밥알처럼 떼어낸다.
문득 아카시아 꽃을 따먹으러
휘어진 나뭇가지에 오르던
배고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재봉·시인, 1956-)
+ 밥과 쓰레기
날 지난 우유를 보며 머뭇거리는 어머니에게
버려부씨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과자를 모으면서
멤생이 갖다줘사 쓰겄다
갈치 살 좀 봐라, 갱아지 있으먼 잘 묵겄다
우유는 디아지 줬으면 쓰것다마는
신 짐치들은 모태갖고 뙤작뙤작 지져사 쓰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