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 10일
배영초등학교 운영위원 일동
목 차
Ⅰ. "2001년 제9회 한일친선어린이대사 우호의 날개"사업
에 대한 평가 및 발전적 제언
Ⅰ. 사업의 경과.…3p
Ⅱ. 본 사업의 시행에 따른 문제점 및 시정방향.
1. 예산의 확보문제 및 대안모색.…4p
2. 행사의 준비문제 및 대안모색.…4p
3. 비참가학생의 위화감 문제 및 대안모색.…5p
Ⅲ. 종합평가.…6p
Ⅱ. 일본 방문기.
1. 2001년 1월 19일 - 드디어 도착하다.…8p
2. 일본에서의 첫식사.…8p
3. 학문신을 모시는 천만궁.…8p
4. 융통성 없는 청저한 시간관념.…9p
5. 미조베교육관 도착.…9p
6. 세고동교류관 회원집에서의 성대한 만찬.…9p
7. 일본에서의 홈스테이.…11p
8. 2001년 1월 20일 - 일본에서의 첫새벽.…11p
9. 타카제소학교 방문.…12p
10. 료낭소학교 방문.…12p
11. 미조베소학교 방문.…13p
12. 설왕설래.…14p
13. 미조베정 학부형회 부회장집 방문.…14p
14. 느닷없는 국제회의.…15p
15. 미조베교육관 주최의 회식.…15p
16. 해프닝의 원인이 밝혀지다.…16p
17. 2001년 1월 21일 - 일본에서의 셋째날 아침.…17p
18. 미야자키 오션돔 방문.…17p
19. 미야자키 지역박물관 방문.…17p
20. 미야자키 신궁 방문.…18p
21.의도된 고생.…18p
22. 온천입욕.…19p
23. 미조베정 소학교선생님들 주최의 만찬.…19p
24. 일본가라오케에서의 2차.…20p
25. 숙소에서 한잔 더.…20p
26. 2001년 1월 22일 - 떠나던 날 가미가제특공대 영정앞에서 기념촬영.…20p
27. 일본에서의 마지막 배웅행사.…21p
28. 부산행 대한항공기에서.…21p
"2001년 제9회 한일친선어린이대사 우호의
날개"사업에 대한 평가 및 발전적 제언.
Ⅰ. 사업의 경과.
일본 가고시마현 미조베정에는 국제교류의 민간활동조직인 "미조베 세고동
교류관이 있고 1986년부터 외국인학생의 홈스테이를 중심으로한 국제교류활
동이 개최되고 있었다. 1991년 4월 주후쿠오카 한국총영사관 친선사절단 일
행의 방문을 미조베 세고동 교류관이 받아들였고, 그때 어린이들간의 한일교
류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같은 국제공항이 있는 마을의 학교간의 교류로
서 배영초등학교와 미조베현 소재 료낭소학교가 특색 있는 학교교육의 일환
으로 정해져 1991년 8월에 최초로 회화 등의 작품교류가 시작되었다. 그후
일본은 미조베정내의 미조베소학교와 타카제소학교가 합류하여 3개소학교
연합형태로 본교와 교류를 시행해오고 있다. 1992년에 제1회 어린이대사 우
호의 날개사업에는 일본에서 료낭소학교 교장1명 교사2명 학부형회 대표2명
아동대표4명 합13명이 배영초등학교를 방문했고 93년에 제2회 94년에 제3회
95년에 제4회때까지 해마다 일본손님들이 본교를 방문했다. 제5회 어린이대
사 행사(97년 1월15일∼18일)때부터는 본교도 일본을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3
박4일간의 일정으로 본교 교장 교사 육성회 대표들과 학생4명 도합8명이 일
본을 방문했다. 그리고 제6회 행사(97년 8월 21일∼ 25일)부터는 보다 발전
된 형태로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본교를 방문한 일본의 방문단이 인솔자 6명
어린이 10명 합16명이 방문했고 , 폭넓은 한일간의 문화체험을 위해 료낭소
학교 어린이 10명을 본교 어린이집에서 홈스테이를 1박 실시했다. 제7회 어
린이대사행사(99년 1월13일∼16일)때에는 일본을 방문하는 본교의 방문단도
인솔자 7명 어린이9명 합16명으로 규모가 늘어났고 일본 어린이 가정에서
어린이들간의 홈스테이를 하였다. 제8회 행사(99년 8월 16일∼20일)때는 일
본측의 방문단이 인솔자 8명 어린이 7명 합15명이 본교를 방문했는데 어린
이 홈스테이를 2박으로 늘렸고, 2000년 1월 14일부터 17일까지 본교방문단도
일본을 방문했다. 제9회 어린이대사 행사(2000년 8월21일∼25일)때는 일본측
에서 인솔자7명 어린이16명 합23명의 대규모 방문단이 본교를 방문했고,
2001년 1월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간의 일정으로 인솔자 9명 어린이 10명
합19의 방문단이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Ⅱ. 본 사업의 시행에 따른 문제점 및 시정방향.
<예산의 확보 문제 및 대안모색>
본교에서는 학교운영위원회와 참가학생 학부모들의 지원만으로 본 교류가
지속되고 있는 반면, 일본에서는 91년 12월에 마을조성기금의 일부를 활용하
기 위하여 미조베정 인재육성기금조례가 실시되어 기금운용에 의한 수입을
원천으로 92년부터는 인재육성 목적의 보조금으로 예산 화하였고, 청소년구
제교류 활동에 대해서는 국제이해교육의 관점으로 그 필요성을 교육위원회
에서도 구체화하여 민간활동단체인 미조베 세고동 교류관, 미조베정내의 3개
소학교인 미조베. 료낭. 타카제소학교, 3개소학교의 학부형회와 함께 실행위
원회를 조직하여 인재육성기금의 보조금을 활동기금으로 92년부터 한일친선
어린이대사 우호의 날개사업을 체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해마다 행사의 규
모가 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장기적인 관점에서 예산의 안정적인 확
보문제를 시급히 고려할 문제다. 회화 등의 작품교류와 같은 단순한 교류를
하던 본교와 료냥소학교 1대1의 교류에서 일본은 미조베정내의 3개교로 확
대하여 교육위원회를 중심한 여러 관심 단체가 지원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
다. 현실적으로 본교가 일본의 3개교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교류하기엔 상당
히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도 일본측의 규모확대 조치를 능동적으로 받
아들이기 위해서는 대저2동내의 덕두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교와 연합하여
본 행사를 시행하는 방법을 고려해볼때다. 그래야만 규모도 엇비슷해지고 예
산의 문제도 3개교가 함께 힘을 합쳐 조성할 때 한결 부담을 덜 수 있을 것
이다. 아울러 강서구청과 북부교육청에 예산지원을 줄기차게 요구하여 제도
적으로 예산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조베 세
고동 교류관과 같은 민간단체를 대저2동 차원에서 구성하여 협력의 우군세
력을 확보하여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일본측이 희망하는 성인들의 교류
도 병행해 나갈 수 있는 단체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행사의 준비 문제 및 대안모색>
제9회 행사의 일환으로 일본방문을 위해 본교와 운영위원회의 준비과정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면이 한둘이 아니다. 1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국제행사를 교무담당 교사 1명이 시일이 촉박한 가운데 준비하는 터라 매끄
러운 준비를 하기엔 역부족인 문제도 없쟎아 있었다. 여권을 신청해야하는
기일이 다되도록 까지 방문자의 명단을 확정하지도 못하고, 행사준비 과정에
서 학부모와 실무교사간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으로 인한 감정대립까지 빚어
지는 불상사도 있었다. 일본현지에서는 미조베소학교에서 마련된 환영식장에
서 일본학생들의 질의내용을 사전에 숙지하지 못했던 관계로 우리 학생들이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창피를 감수하기도 했고, 교육위원회 회의실에서
미조베 세고동 교류관 주최의 "앞으로의 한일친선어린이대사 우호의 날개
사업"에 대한 갑작스런 회의자리를 맞아 기본적인 사전지식이나 우리측의
통일된 의견하나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회의에 임해야했던 사건은 하나의 치
욕이었음에 틀림없다. 당일에 교육위원회 숙소에서 치욕적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중 일본측에서 일부러 우리를 골탕먹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행사준비
과정에서 일본의 실무진이 보내온 여러 장의 팩스가운데 미처 챙기지 못한
서류가 있었고, 그것이 우리의 실책이었음이 드러났을 때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도 역시 배영초등학교
만 미조베정의 3개 소학교와 교류를 하겠다는 근시안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때만이 그 해결책이 모색되리라 본다. 본교와 덕두초등학교, 중앙초등학교의
3개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운영위원회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민간단체와 구
청이나 동사무소 교육청의 지원이 이루어지는 "한일친선어린이 대사 우호의
날개 사업" 지원을 위한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어 연중 내내 체계적으로 행사
의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측의 바램은 어린이들만의 교류가 아니라,
장차 민간교류로까지 확대하기를 원하는 의지를 고려할 때, 그리고 해를 더
할수록 방문단의 규모나 행사의 질이 한층 높아지는 현실에 부응하기 위해
서도 시급히 우리내부의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이 절실한 것이다.
<비참가 학생의 위화감 문제 및 대안모색>
금번 일본 견학 행선지중 학문의 신을 모신다는 천만궁을 비롯하여 오션돔
해수욕장 그리고 미야자키 신궁의 방문 등 우리 어린 학생들에겐 평생을 두
고 기억에 남을만한 훌륭한 추억이 되기에 충분하다. 가난한 농촌마을의 어
린이가 일본을 여행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어쩌면 선택받은 행운아이며 일본
의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보고 느끼는 경험과 일본 어린이와 지속적
인 교류를 하면서 성인이 되어서도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돈
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인생자산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혜택
을 누리지 못하는 비참가 학생들이 느끼는 위화감과 가난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 부모들의 쓰라린 심정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비행기
왕복 경비와 약간의 용돈만 준비하면 되는 일본견학시 필요한 경비가 부담
스러워 자기자식을 교류 단에 참가시키지 않을 부모는 없으리라 본다. 홈스
테이를 기본조건으로 하는 본 교류행사에서는 자신들의 가난한 살림집에 차
마 외국의 어린 손님을 접대할 수 없다는 부담감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번
방문기간중 일본측에서는 우리들이 얼마나 방문하던지 모두 받아들일 수 있
음을 분명히 한 터이다. 어쨌든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에 가난을 이유로
동심에 상처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 함께 참가한다는 원칙을 정하자.
낙오자 없이 모든 어린이들에게 일본의 문화와 그들의 생활상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자. 방법은 금년 여름방학때 본교를 방문하는 일본
어린이들의 숫자에 제한을 두지 말고 모두 받아들이되, 6학년학생중 그 동안
일본을 방문치 못했던 학생들의 학부모를 설득하여 가급적이면 모두 홈스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권고하자. 일본측이 소개한 세고동 교류관의 이념
중에는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실생활 속에서 있는 그대로를 체험하
여 국제교류를 통한 우호증진을 돕는 것이 목적"이라 하였듯이 가식이나 꾸
밈없이 다만 손님맞이를 위해 조금만 깨끗이 하여 외국손님을 맞는다면 그
것으로 족하다는 사실을 비참가학부모들에게 설명하며 설득하였으면 한다.
실생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고 싶다는 일본친구들의 바램을 충족하는
것이기도 하고, 장기적으로 서로간에 부담 없이 오랫동안 교류를 지속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함에도 부득이 홈스테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딱한 사정의 학생들에겐 우리도 세고동 교류관과 같은 민간단체가 포
함되는 실행위원회가 구성될 시 경비문제와 홈스테이를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학교 졸업생은 어느 누구나
일본견학을 통해 인생의 견문을 넓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부여해주는 것
이 우리 성인된 사람들의 책임이 아닌가 생각된다.
Ⅱ. 종합평가.
나 스스로도 40줄이 다되어 가도록 외국여행을 처음 다녀온 터라 금번의 일
본 방문에서 보고 느낀 점은 하나의 충격이라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많은
공부 가된 견학이었다. 오늘날은 국제화시대이며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일진
데 우물안 개구리 마냥 좁은 시야로는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낙오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을 하게되었다. 많은 경비를 들이지 않고도 감수성 좋은 어
린 학생들이 외국의 가정에서 그들의 실생활을 통해 접한 문화체험은 일생
동안 미치게될 영향력을 고려해볼 때, 그 의미는 지대하다 할 것이다. 본교
가 11년째 "외국가정에서의 홈스테이를 통한 실생활 속의 체험으로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재대로 인식하여 국제화시대에 걸맞은 견문을 우리학생들에
게 체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시행해온 한일문화교류는 교육적으로 대단히
의미가 있으며 계속적으로 이어 나아가야 할 훌륭한 교육자산이라 생각되어
진다. 다만 지속적인 교류를 위해서는 일본측 세고동 교류관 관계자들의 지
적 되로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가지 않는 장치의 마련이 있으야하고, 치밀하
고 매끈한 일정관리를 통한 교육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행사주최측의 준비문
제 그리고 소외되는 학생들을 위한 방안모색 등, 보다 효율적인 교류를 위한
부단한 연구와 자기반성을 필요로한 시점이라 사료된다.
일본 방문기
2001년 1월 19일 - 드디어 도착하다.
우리 배영초등학교와 미조베정내의 료낭, 타카제, 미조베 3개소학교와는 회
화 등의 작품교류로부터 시작하면 11년째, 한일친선어린이대사 우호의 날개
사업은 9회째, 홈스테이를 통한 실생활 속에서의 한일문화의 체험교류는 3년
째 실시하고 있다. 겨울방학 때는 우리가 방문하고 여름방학 때는 일본의 학
부모와 학생들이 우리의 가정을 방문하여 홈스테이를 하며 체험교류를 해오
고 있다. 2001년 1월 19일 오전11시 30분 드디어 한일 친선 어린이대사 자매
학교방문을 목적으로 10명의 배영초등학교 학생들과 3명의 선생님 그리고 6
명의 학교운영위원들이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가고시마현 미조베정의 3개소
학교를 방문하기 위해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로비에는 면이 낯익은
분들이 나와 반갑게 우리들을 맞이했다. 지난 여름방학때 부산을 방문하였던
관계로 안면이 있는 오사무 미조베교육장과 실무를 담당하는 이사무, 미조베
소학교 교장선생님 그리고 미조베정 학부형 대표였다. 일본측이 준비한 30인
승 버스를 타고 4시간 가량이 소요되는 가고시마현 미조베정 교육위원회를
향해 가면서 중간 중간에 휴게실 3곳과 천만궁을 견학하기로 일정이 잡혀있
었다.
일본에서의 첫식사.
12시 40분, 첫 휴게실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서 정갈
되게 준비된 음식은 참치의 속살과 알을 잘 양념하여 밥에 섞어 찐 밥과 닝
닝한 맛 투성이의 일본식 반찬 몇 가지였는데 학생들은 물론이고 인솔자들
도 겨우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영 입에 맞지를 않았다. 벌써부터 김치와 얼
큰한 매운탕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학문 신을 모시는 천만궁
오후 1시 45분, 학문 신을 모신다는 천만궁에 도착했다. 일본도 우리 나라
못지 않게 동경대학을 비롯한 몇몇 1류대학을 가기 위해 치열한 입시열풍이
있다하는데 그 단면을 잘볼수있는 것이 1300년된 천만궁이라는 큰 규모의
절이었다. 절 입구에서부터 1,000미터 가까이 나른히 들어선 가게들은 모두
가 합격을 기원하는 부적이나 떡 인형 따위를 파는 가게들이었다. 절 안에는
역사를 짐작케하는 고목들과 이끼가 끼여있는 석탑 그리고 웅장한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나무로 만든 부적을 파는 신녀들의 복장이 마치 그 옛날
백제의 여인네들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부적에 지원한 학교명과 학과
그리고 학생의 이름을 기재하여 대웅전에 나란히 진열한 채 합장을 하는 모
습은 자못 진지해 보였다. 한국에서 온 아주머니 한 분도 부적을 쓰고 있었
는데 우리일행중 한 명이 한국학생은 효험이 없다고 농담을 건네자 머쓱한
표정으로 장난 삼아 해본다라고 얼버무리는 모습은 영 깨운 치가 못했다. 관
광객의 절반이상이 한국사람이었는데 국내경제사정을 고려해볼 때 놀라운
사실이었다.
융통성 없는 철저한 시간관념.
일본의 일반도로는 한결같이 2차선의 좁은 도로였는데 신기하게도 차량이
정체되는 모습이나 제한속도인 30키로 내지 40키로를 어기는 차량도 찾아볼
수 없었고 경적소리 한번 들을 수도 없었다. 몇 시간을 고속도로를 달려도
함정 단속하는 교통순경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초행길의 운전사들도 쉽게 도
로사정을 알 수 있도록 안내표지 문이 세세하게 적혀있는 것이 인상적이었
다. 두 번째 휴게실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터라 세 번째 휴게실은 그냥 지
나쳐도 될법한데 일정에 있는 대로 휴게실에 정차하였다. 이유는 오후 6시
30분에 미조베 교육관에 도착을 해야하는데 그 시간에 맞추어 가기 위해서
라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 철저한 시간관념에 혀를 내둘렀으며 융통성 없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단면에 읽을 수 있었다.
미조베교육관 도착.
몇 시간을 차로 달려온 관계로 모두들 녹초가 된 채로 해가 어둑어둑해져서
야 미조베교육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간단히 여장을 푼후, 교육관 로비에서
일본측의 홈스테이 가정의 학생들과 학부모 학교선생님들 그리고 세고동 교
류관 관계자들이 한 줄로 서고 우리일행이 한 줄로선 가운데 서로 마주보며
간단한 환영식 행사를 하며 3박4일간 함께 생활할 일본사람들과 반갑게 인
사를 하였다. 일본측은 이번 방문부터 인솔자들도 홈스테이를 하자고 요청을
했었는데 쑥기없는 우리 운영위원들이 한사코 거절하다 1박만 홈스테이를
하는 선에서 합의를 본 터이라, 본교 학생들을 홈스테이 가정으로 인계한 후
4개조로 나뉘어 인솔자들도 미조베 세고동교류관 회원들의 가정으로 향했다.
세고동교류관 회원 집에서의 성대한 만찬.
나와 김동일위원은 일본식 절에서 생활하는 주지스님부부의 가정에서 홈스
테이를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저녁식사를 위해 인근에서 부유한 편에 속하는
농기구 수리센타를 운영하는 세고동교류관 회원의 집에 우리선생님들과 함
께 안내되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정숙한 이미지의 할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세명의 자녀들이 다소 민망할 정도로 허리를 90도로 숙여가며 반갑게 맞아
주면서 일일이 식구들을 소개하였다. 다다미방으로 된 넓은 응접실에 풍성하
게 식사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음식을 나르는 일들은 아이들의 몫인 듯 몸에
뵌 듯한 태도로 음식을 차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고기와 우동 배추 등
을 넣어 일본간장으로 양념한 일본전골이 끓기 시작하자 저녁식사가 시작되
었다. 음식이 전반적으로 너무 달고 느끼하여 통 입에 맞질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위해 서울여행길에 사왔다는 김치와 고추장은 예의상 사양하고 전통
일본음식만으로 식사를 하였다. 생닭고기 토막을 육회라 하여 내어왔다. 가
고시마지방에서만 즐겨먹는 음식이라는데 차마 먹을 수 없었다. 식사중간에
방금 서울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이 집의 아들을 포함한 인근의 세고동
교류관회원들이 합류하여 인사를 나누며 함께 식사를 했다. 그들은 자주 한
국여행을 하는 편이라 했으며 이런저런 관심사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
다. 그 중에서도 농업에 대한 공동관심사가 단연 으뜸이었는데 일본도 중국
산 수입농산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애기, 단맛을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당도 높은 과일을 생산하기 위한 품종개량을 계속한다
는 애기, 일본은 우루과이라운드에 대비하여 벌써부터 정부의 농민지원정책
들이 농협으로 이관되었으며 일본의 농협에 의한 농산물유통기능이 확고하
게 정착되어 농민들은 출하가격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고, 단지 품
질 좋은 농산물생산에만 신경 쓴다는 애기를 듣노라니, 애써 농사지은 채소
를 시세가 폭락하여 갈아엎기를 밥먹듯 하는 우리의 입장에선 부러우면서도
우리의 농정당국인 정부와 농협에 대해 울분이 치밀기도 했다. 김동일위원과
내가 홈스테이를 하게되어있는 주지스님의 부인이 찾아왔는데 응접실의 동
쪽에 차려진 금빛모양의 재단을 향해 합장을 한후 우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쟎아도 이 집을 들어서면서부터 가장 신기하게 생각되었던 터라 유심히
관찰 중이었는데 방문하는 손님들마다 먼저 금빛재단을 향해 무릎꿇고 합장
을 한후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그 집의 주인이 들려주는 설명은 돌아가
신 조상들의 화장후 뼛가루 조금씩을 모은 단지라했으며 아침에 일어나 정
안수를 떠놓고 인사하고 외출후 집에 돌아와서도 제일먼저 인사하고 남의
집을 방문할 때도 그 집의 조상재단에 가장먼저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사라는 토속신앙을 믿는데 일종의 조상신을 위하는 의
식이라 했다. 그재단옆에는 여자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에는 대부분 장식을 한
다는 계단모양의 목가 구에 일본전통의상인 키모노를 입은 예쁜 인형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는데 매년 3월 3일에 어른들이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뜻에서 올려놓는다 하였다. 그 집의 아이 엄마가 우리 자
모회장의 딸아이를 위해 자기 딸의 키모노를 보여주며 입어보라 하였다. 기
념이 될만한 사진을 찍어주려는 배려의 마음에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들이 함께 만들었다는 가족달력엔 그 집 아이들의 사진이 편집되어있었
고 아이들과 함께 천진스럽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아빠는 대단히 가
정적인 사람인 듯 했다. 정성스런 식사에 감사의 인사를 한후 스님부부의 안
내로 홈스테이 가정인 절에 도착했다.
일본에서의 홈스테이
우리 나라의 절과는 거리가 있는 아담하면서도 오래된 고택에 왔다는 느낌
이드는 일본식 절이었는데 우리 나라 스님처럼 머리를 깎고 도를 닦는 모습
이 아니라 머리도 기르고 두북한 수염을 기른 채 명랑한 딸 하나를 둔 평범
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2층에 마련된 숙소에서 여정을 푼후 한국에서 준비해
간 포장김 2통을 선물로 건네자 대단히 고마워했다. 응접실중간 네모판 아래
에 구덩이를 파 뜨거운 돌을 깔아놓고 판 옆으로는 이불을 꿰메붙여 그 안
에 다리만 집어넣어 훈기를 느끼게 하는 응접실에서 스님부부가 간소한 술
자리를 마련했다. 정답게 둘러앉아 따뜻한 물에 타먹는 일본소주를 두어 잔
나누며 통역관 없이 한자를 쓰가며 겨우 겨우 나누는 정담이 일본에서의 첫
밤을 퍽이나 정겹게 만들었다. 두꺼운 이불을 깔고 덮는 다다미방에서의 잠
자리는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으나 새벽이 되자 콧잔등이 찡할 정도의 한기
를 느끼게 했다.
2001년 1월 20일 - 일본에서의 첫 새벽.
어젯밤 스님의 부인이 일러준 새벽 6시 30분에 기상하여 7시에 아침식사를
한다는 강박감 탓인지 새벽6시도 안돼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돈
한 후 기상시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융통성이 없고, 일본식으로는 철저한 시간관념 속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방식
을 존중하는 뜻에서다. 기상시간에 맞추어 세면을 한후 소지품을 챙기며 기
다리고 있으니 7시를 알리는 쾌종소리와 동시에 "김상 아침 식사하세요"라는
부인의 소리가 들렸다. 정확을 요구하며 철저하게 살아가는 일본사람들의 태
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식단에는 우리가 선물한 김을 맛김
크기에서 다시 3등분하여 내어놓았는데 일본의 대부분 음식이 그렇듯 먹을
만큼만 조금씩 내어놓았는데 실제로 남기는 음식이 없었다. 해장국으로 나온
일본 된장국은 그런 대로 시원한 맛을 느끼게 했다. 식사후 부인의 안내로
법당을 구경했는데 불상인 듯한 금색인형은 석가모니의 모습이 아닌 호리호
리한 여인상을 연상케 했고, 잘 손질된 일본식 정원으로 단장된 경내는 수수
한 모습이었다. 스님부부는 고맙게도 일본전통차를 정성스레 포장하여 우리
들에게 선물하였고, 오늘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는 타카제소학교까지 몸소 차
로 실어주었다. 오늘 저녁 미조베교육관에서 있을 예정인 환영식행사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따뜻한 대접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차례한후 1박의 홈스테
이를 모두 마쳤다.
타카제소학교 방문.
8시 20분. 이미 도착해있던 우리 인솔자 일행들과 홈스테이 가정에서의 경험
담을 서로 주고받고 있는 사이, 타카제소학교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교장실을
들어섰다. 역시 따뜻한 일본차가 나왔는데 향과 빛깔이 우리의 녹차와는 비
교가 되었다. 일본사람들은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고 우리의 숭늉 격으로 수
시로 일본차를 마신다 했다. 교장실에는 역대 교장선생님들의 영정이 걸려있
었고 학교의 역사를 한눈에도 알 수 있도록 액자 속에 잘 보관돼 있었다. 역
대 체육대회에서 딴 우승기들도 잘 정돈돼 있었는데 우리학교의 그많던 우
승기들은 제대로 보관돼 있지 못한 현실을 떠올리니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
었다. 교장선생님의 친절한 안내로 학교구석구석을 둘러보았는데 우리학교의
시설물에 비해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었으나 넓은 풀장과 실내체육관이
일본소학교의 기본적인 시설물이라는 설명에는 다들 부러운 눈길을 보내는
표정이었다. 일본소학교의 겨울방학은 2주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방
문했을 때에는 벌써 개학을 하여 수업을 받고있었는데 일본아이들의 수업분
위기는 우리네와 별반 차이가 없는 듯 했다. 아이들의 복장은 우리가 초등학
교를 다닐 때, 시내학생들이 입고 다녔던 넓은 에리의 검정색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모두가 반바지에 짧은치마를 한 탓에 다소 춥게 보였다. 일본에서
는 학생들을 어릴 때부터 강하게 키우기 위해 한겨울에도 모두가 짧은 반바
지를 입고 다니게 한다는 설명이었다. 교실이나 복도에 걸린 표창장이며 그
림이며 환경미화의 전반적 분위기가 우리가 다니던 70년대의 우리학교 모습
을 연상시켰는데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혼자생각으로도 알 수 있었다. 우리
의 교육이 해방이후에도 그대로 일본식교육을 답습한 까닭이었으리라. 요사
이에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료낭소학교 방문.
곧이어 료낭소학교로 이동하여 작년에 본교를 방문한 적이 있어 낮이 익은
시골아저씨같이 친근하게 생기신 료낭소학교 교장선생님의 친절한 안내로
학교견학을 했다. 일본학생들과 함께 등교하여 체육관에서 함께 놀이를 하며
수업중인 우리아이들을 보니 대견스러워 보였다. 여자아이들은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어∼"와 비슷한 놀이를 하고있었고 남자아이들은 핸드볼 비슷한
놀이를 하면서 우리더러 같이 어울리자해 웃옷을 벗어 던지고 함께 공놀이
를 하였다. 이윽고 교장선생님이 준비하신 정성스런 녹차선물을 받아들고 한
일학생들간의 교류회 일정을 위해 미조베소학교로 향했다.
미조베소학교 방문.
미조베소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어제 공항에서부터 마중을 나온 터이고, 역시
작년에 본교를 방문하셨던 터라 부담 없이 우리들을 대해주셨다. 특히 본 교
류 때문에 독학으로 한국말을 배웠다는데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제법 우리
말을 잘하시는 분이시다. 교장실에서 교장선생님의 사모님께서 손수 준비하
였다는 일본 단팥죽과 미조베현 특산품인 과자를 들며 환담을 나눈 후 교류
회가 열릴 예정인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에는 230여명의 학생들과 교사
들이 우리일행을 마주보는 모습으로 정열한채 앉아있었다. 학생밴드부가 애
국가와 본교 교가를 연주하며 우리를 환영했다. 축사를 비롯하여 방문자소개
를 한후 자리에 앉아 키모노를 입은 예쁘게 생긴 일본 여학생 2명이 묘한
동작으로 연기하는 일본전통 무용을 감상했다. 이윽고 미조베소학교의 전교
생이 가고시마전통 어부들의 복장으로 격한 동작이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단
체체조 같은 무용을 시범 보였는데 그기압소리가 어찌나 크고 동작하나가
절도가 있던지 흡사 소름이 끼칠 듯한 그들의 조직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일학생들의 교류회 하이라이트인 평소 양국의 문화에 대해 궁금해하는 점
을 서로가 질의응답 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일본아이들이 먼저 질문을 시작
했다. 메모지에 적은 질문지를 들고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질문을 했는데 질
문내용은 지극히 초등학교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평범한 내용들이었다. 일본
의 스모와 비슷한 한국의 씨름은 어떻게 하는 운동입니까? 일본은 전자제품
을 많이 수출하는 회사로 소니가 있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수출회사
는 어디입니까? 한국의 큰 항구는 어디입니까? 한국의 겨울날씨는 어떻습니
까? 와 같은 평이한 질문들이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
다. 우리아이들이 긴장을 한 탓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
는 수없이 뒷자리에 앉아있던 교무선생께서 한마디 한마디하면 일러주면 그
것을 우리아이들은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서 답변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
가 연출되고 말았고, 이를 지켜보던 우리 운영위원들은 머리를 숙인 채 이
악몽의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설왕설래.
어쨌든 교류회는 모두 끝났고 점심식사를 위해 부폐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차안에서 우리 운영위원들은 일본에서 3년째 생활하고 있는 신상으로 불리
던 통역관과 즉석 토론이 벌어졌다. 그녀가 평소 지켜본 일본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으며 발표력 또한 마찬가지란 것이다.
어른들도 갑자기 질문하면 잘 아는 내용도 제대로 말못할 수가 많은데, 하물
며 초등학생들이 이국 땅에서 200여명의 외국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갑
자기 질문을 하면 긴장 탓에 답변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
가. 그렇다면 명색이 국제행사인데 일본사람들이 우리아이들의 바보 같은 모
습을 보고싶어서 일부러 연출한 것인가. 신상의 의견은 일본사람들의 철저
한 준비정신에 비춰볼 때 본교류행사의 준비과정에서, 일본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궁금한 점이 이러이러한 내용이며 미리 아이들에게 숙지시켜주기 바란
다는 내용을 분명히 사전통지했을것인데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것같다라는 것
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교류회의 끝부분이 매끄럽지 못해 영 뒷맛이 개운
치 못했다.
미조베정 학부형회 부회장집 방문.
부폐식당에서 모처럼 김치를 실컷 먹으며 느끼했던 속이 편해지니 영락없이
한국사람이었다. 커피한잔과 담배한대를 피운 후 딸기농장을 견학가는길에
미조베정 학부형회 부회장 집을 방문했다. 차농사를 8㏊(24,000평)나 짓는다
는 부농답지 않게 깔끔하지만 소박하게 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응접실
동편으로는 역시 조상신을 모시는 재단이 있었고, 그 옆에는 이 집의 여자아
이를 위한 3월 3일날 선물한 예쁜 인형들이 계단식목각위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차농사를 짓는 일본농민들은 3내지 5㏊의 농사를 짓는데 대부분 직
접 가공을 하여 완제품을 농협에 납품한다는데 이 집의 연간수입은 우리 돈
으로 10억원이나되는 인근에서도 몇안되는 부농이란다. 우리 나라 같으면
100여평의 큰집을 지어 살만도 한데 30여평 남짓한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시
키며 세세하게 설명하는 그들에게서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며 생활하는 것을
마치 미덕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태평양전쟁의 폐허에서 오늘의 경제대국
일본이 있기까지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느닷없는 국제회의.
우리의 비닐하우스와 별반 차이가 없는 딸기농장을 방문하여 농사짓는 사
람들간의 공동관심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후, 오늘부터 2박을 하게될
미조베정 교육관 2층에 마련된 숙소로 돌아와 여정을 풀었다. 오후 5시 30
분, 영문도 모른 채 우리 인솔자일행은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그 자리에는
미조베 세고동교류관 회원들이 두툼한 서류를 준비한 채 "앞으로의 한일친
선어린이대사 우호의 날개사업"에 대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필기도구
하나 없이 멍청하게 자리에 앉으며 낮에 미조베소학교에서 있었던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회의의 주제에 대해 우리들간에 전혀 논의가 안된 채 도
대체 무슨 회의를 한 단말인가? 명색이 국제회의라면 국제회의인데 필기도
구 하나 없이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그들의 질문에 대해 대충대충 상황대
처식의 임기응변으로 일관하였고 심지어 통역관은 우리에게 통일된 의견을
말해달라고 주문할 정도였으니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쨌든 일본측의 제의
는 본 교류를 기존의 학생중심 프로그램 외에 성인프로그램도 겸했으면 어
떠냐는 제의였고, 우리는 여러 사정상 기존의 학생중심의 프로그램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인프로그램을 가미하는 방식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특히 일본
은 미조베정 교육위원회가 예산을 지원하고 있지만 우리는 전액 자부담인
관계로 경제적 어려움이 있음을 시인하자, 세고동 교육관 회장은 장기적인
교류를 위해서도 경제적 부담이 적은 방법을 모색해달라며 오히려 작년 부
산방문시 극진한 환대에 감사하다는 말로 우리를 위로하는 듯 했다. 금년 여
름방학 때인 제10회 어린이대사행사시 세고동교류관 회원들도 함께 부산을
방문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그때 1박을 홈스테이하며 교류를 넓혀나가자는
제의로 응답했고 의미 있는 어린이대사 교류를 오랫동안 지속하자는 결론으
로 겨우 회의를 마무리한 후 우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조베교육관 주최의 회식.
잠시후 교육관 강당에 준비된 미조베교육관 주최의 회식자리에 안내되었는
데 교육장과 3개소학교 선생님들을 비롯한 교육위원회 관계자들 뿐만 아니
라 미조베정의 자치단체 관계자들 그리고 세고동교류관 회원들 그 외 어린
이홈스테이 학부모들로 그넓은 강당이 가득차 있는것을보고 이 사람들의 한
일교류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미조베정 학부
형대표의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장내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사회자가 준비
한 신문지마술을 보며 일본사람들의 철저한 준비정신을 다시 한번 느끼게되
었다. 간단한 환영 식을 마치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일본측이 준비한 음식과
일본소주 그리고 우리가 준비해간 국산소주를 들며 회식이 시작되었다. 전날
수의사를 하는 세고동교류관 회원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던 윤준노 위원이
일본사람들은 물에 타먹는 일본소주를 원액 채로 큰병 1병을 다먹는 것을
보고 한국사람들은 소주를 무척 잘 마신다고 생각하는 듯 일본사람들이 돌
아가며 우리 곁으로와 술을 권하며 대화하기를 원했다. 윤준노위원은 결국
오늘밤에도 일본소주를 혼자서 한 병을 다비운후 일본사람들로부터 "소주
오야봉"이라는 별칭을 얻게되었다. 일본사람들은 절대로 한번에 잔을 비우는
법이 없었다. 조금만 비우면 잔을 채워주고 하는 식으로 한잔을 가지고 대여
섯번을 갈라먹는 주법에 비하면 우리는 한번에 잔을 비우는 주법이니 같은
시간이라도 우리가 몇 배로 많은 량의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한잔두잔
술자리가 더해질수록 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특히 미조베정 문화원장과의 대
화 중에는 한일간의 뿌리깊은 민족감정 등, 예민한 문제에 대한 대화도 있었
다. 그분의 대답은 일제시대를 산 나이 많은 사람들은 한국을 경시하는 풍조
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전후세대는 그런 감정이 거의 없다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해선 즉답을 회피한 채 논쟁을 피하고 싶은 듯 슬 거
머니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7시부터 시작된 회식이
9시 30분이 되자 예정된 시간이 다되었다며 회식을 마무리한다는 사회자의
주문으로 한참 흥이 오른 자리를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과감히
자리를 일어서는 그들을 보면서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그만 화가 나고 말았
다. 술과 안주도 아직 많이 남았고 시간도 9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흥겨
운 술자리를 깬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한사코 사양하는 일본사
람들을 우리숙소로 함께와 준비해간 총각김치를 안주 삼아 자정이 넘게까지
국산소주로 한잔을 더하며 진하게 우의를 다졌다. 맥주를 좋아하는 나를 위
해 교육위원회 실무자인 이사무는 한참을 가야 있는 가게까지 갔다와 맥주
를 사왔다. 역시 남자들의 술자리에서는 평소 통역관 없이는 한마디도 못하
던 사람들이 별어려움없이 손짓발짓으로 웬만한 대화가 다 소통되었다.
해프닝의 원인이 밝혀지다.
추억에 남을만한 술자리를 끝내고 일본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후 우리일행들
만 남아 남은 술잔을 몇 잔씩 더돌리며 오늘 일들에 대해 간단한 토론이
있었다. 미조베소학교에서 있었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그리고 세고동
교류관 회원들과 준비 없이 회의에 임했던 사건,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
들끼리는 치욕이라 말하는 부류와 크게 유난떨 일도 아닌 별일이 아니라는
말하는 부류로 나뉘어 격론을 벌였다. 그 와중에서 오늘 있었던 모든 해프닝
의 원인이 밝혀졌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우리측의 실무 준비과정에서 일본으
로부터 보내온 많은 팩스들중 너무 바빠서 다챙기지못한 서류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일본에서의 둘째 밤
을 청했다. 정말로 길고 긴 하루였다.
2001년 1월 21일 - 일본에서의 셋째날 아침.
어젯밤, 너무 과음한 탓이었을까, 6시 반경에 힘겹게 겨우 일어났다. 8시까지
본관마당에서 집합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충 세면을 하고선 1층 식당
으로 내려갔다. 언제 차려놓았는지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어젯밤 먹다
남은 김치와 일본된장국으로 그런 대로 속풀이를 하였다. 식당을 나서는데
입구에 진열된 사진들을 보고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조베정 출신의 가미
가제특공대원들의 영정사진 수십개였다. 통역관의 설명으로는 원래 이 자리
가 태평양전쟁때 가미가제특공대의 지역본부라 했다. 이토록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자살특공대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까, 일본사람들의
친절 뒤에 감춰진 또다른 얼굴을 보았다 고나 할까. 부랴부랴 챙겨서 내려갔
는데도 우리일행은 일본사람들을 20분이나 추운 마당에서 떨게 하고야 말았
다. 홈스테이가정의 학부모들과 학생들 그리고 교육위원회 관계자들이 모두
대기해 있었다.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야자키 오션돔 방문.
10시 30분 미야자키에 있는 오션돔에 도착했다. 한마디로 바닷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겨울해변가였다. 인공적으로 파도를 만들어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
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돔 해수욕장은 일본의 상술과 과학기술이 만든 결
정판과도 같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아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뛰어 다녔고, 인솔자의 일부는 아이들이 안심하고 놀 수 있도록 해
변가에서 지켜보면서 안전사고에 대비했다. 나머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기념촬영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2시에 구내식당에서 파도타기 쇼
를 즐기며 양식으로 점심식사를 한후 아이들은 더 놀 수 있도록 배려하고선
인솔자 일행은 미야자키 지방박물관을 방문했다.
미야자키 지역박물관 방문.
공룡화석이며 동식물의 생태관을 둘러보고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옛날부터
현재까지 모조리 옮겨 놓은 듯한 정교한 재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나의 발길을 한동안이나 멈추게했던곳이 일본의 근세 생활관이었다. 태
평양전쟁의 패전후 일본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재현한 곳이었는데 당시의 가
옥이며 옷가지들과 그들의 참담한 구체적인 생활상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
다. 패전의 쓰라린 기억을 잊지 않고 두고두고 보존하여 후세에 보여주려는
다분히 의도된 연출로 보였다. 경제대국이면서도 국민 개개인은 그토록 검소
하게 생활하는 그들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서운 사람들이란 생각이
또한번 뇌리를 스쳐갔다.
미야자키 신궁 방문.
오후 3시, 미야자키 신궁견학을 했다. 통역관의 설명은 일본국민의 90% 이상
이 신사라는 일본전통 종교를 믿고있는데, 그 절 건물 격인 신궁은 우리 나
라의 성황당과 같은 곳이라 했다. 바닷가에는 용왕을 모시는 신궁이 있고 산
골에는 산신령을 모시는 신궁, 그리고 신문지상에 자주 보도되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정치인들이 연초에 신사 참배한다는 동경에 있는 2차대전때
전사자들의 위패를 모신 신궁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신궁이 있다했
다. 신궁은 그들의 삶속에서 언제나 함께 하는 생활 같은 것이라 한다. 미야
자키 신궁에 들어서자 한건물안에는 새차를 출고하여 사고가 없도록 기원하
는 고사를 지내는 모습과 자기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한 건물에는 태어난 갓난아기를 안고 부모들이 전통의상을 입은 채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는 굿을 하기 위해 자기차례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신궁의 본 건물에는 우리의 무당 격인 사람들이 북을 치며 갓난아기
에게 주문을 외면서 어떤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자못 진지한 모습이었다.
일본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런 의식을 치르며 신년 1월 1일에는 누구나 신궁
을 찾는 것으로 한해를 시작한다 한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3일을 보내는
동안 십자가가 걸린 교회건물을 본적이 없었다. 그들의 문화를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일본인들, 서기를 사용하지 않고 천황의 즉위원년을 고집하는 일본
인들, 차량의 핸들위치를 굳이 우측에 설치하는 일본인들, 참으로 대단한 고
집을 지닌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션돔을 떠난 우리아이들과 일본아이
들이 신궁에 도착했다. 함께 기념촬영을하며 시간을 보낸 후 버스를 타기 위
해 집합장소로 향했다.
의도된 고생.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불을 끄고 꽁초를 집어넣으려고 주머니 속의 꽁초만
모으려고 준비해둔 담뱃갑을 꺼냈더니 벌써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소복이
쌓였다. 남의 나라에 와서 한국사람들 욕먹을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다분히
의도적인 고생을 하는 중이다.
온천입욕.
오후6시 미조베교육관에 도착하여 간단한 세면도구만 준비한 채로 공중온천
탕에서 목욕을 즐겼다. 우리의 마을 공중목욕탕 정도의 시설이었지만 오리지
널 온천인지라 물이 너무 좋았다. 시간 탓에 오래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
웠지만 천연온천을 우리 돈으로 2000원정도로 매일 즐길 수 있는 이곳사람
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조베정 소학교선생님들 주최의 만찬.
미조베정 3개소학교 선생님들이 마련한 체코슬로바키아식 식당에서 바비큐
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했다. 이곳에서는 지정된 시간까지는 술을 얼마나 시
켜도 같은 값이라 하므로 그렇쟎아도 주량이 많은 우리일행으로선 부담 없
이 갖가지종류의 맥주며 위스키를 실컷 마실 수 있었다. 료낭소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특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분의 말씀가운데 일본은 패전후
오로지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달려왔는데 경제적으로 번영을 이룬 오늘날에
와서 뒤돌아보니 정신적인 공허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청소년들의 정
신적 공황상태는 심각한 수준이다 는 애기. 그리고 일본에는 한국에 대한 특
별한 민족감정은 없다, 과거 일본이 침략했던 중국이나 대만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중 그 하나일 뿐이며 가해자로서 반성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일
본의 교육자로서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애기. 일본사람들은 몸에뵌 검소한 생
활 탓에 여자들도 머리나 외모에는 그다지 가꾸지 않는 편이나 그 또한 나
름대로는 멋으로 생각한다는 애기. 일본국민의 대다수는 다다미방에서 생활
하기 때문에 겨울난방기가 적게들며, 어릴 적부터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단
련을 시킨다는 애기. 일본가정의 전력은 대부분 110V인데 그것으로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굳이 220V로 교체하지 않는다는 애기. 그리고 일본학생
들이 한국으로 견학을 갈 때,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고 한국의 전통적인 예
의범절을 배워올 것을 당부한다는 애기를 들었을 땐 오늘날의 우리 현실을
돌아보고는 차라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대부분 전통가옥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홈스테이를 하며 우리아이들이 일본의 문화를 체험하기에
적합하나 우리마을은 이미 온돌구조의 전통가옥이 사라진지 오래고 기름보
일러를 때는 양식가옥이 대부분이라 한국의 전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고하자, 그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현재 살고있는 그대로의 모
습을 보고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약속된 시간이 다되어 자리를 일
어 설려는데 미조베정의 학부형대표들이 2차로 가라오케에서 한잔을 더하자
는 제의를 해왔다길래 남자들만 2차를 가기로 했다.
일본가라오케에서의 2차.
호텔가라오케에 들어서니 이미와 있던 한 무리의 학부형대표들이 우리를 환
영하는 뜻에서인지, 돌아와요 부산항에등 한국가요를 부르며 흥을 돋구고 있
었다. 위스키와 맥주를 들며 술자리의 분위기는 한층 흥겨워지는데 우리더러
노래를 불러라 성화다. 돌아가면서 타향살이를 비롯 몇 곡조를 뽑아내니 원
드 풀을 연발하며 우리일행의 노래솜씨에 탄성을 자아내었다. 아닌게아니라
우리일행은 평소에도 얼큰하게 손발이 받는 날에는 자주 어울려 노래방을
다니곤 하는 지라 제법 폼나게 흥을 돋울 줄 아는 편이었다. 소주오야봉이라
불리던 윤준노위원은 오늘도 체코식당에서 굳이 위스키를 주문하여 한 병을
다비운후 가라오케에서 우리가 노래부르는 사이, 소파에 기대 곯아 떨어져버
렸다. 술에는 장사가 없는 법, 3일 연장으로 폭주를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숙소에서 한전 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사무에게 담배한대 있느냐했더니 차를 정차시키더
니 담배한보루를 사주며 나누어 피우라하는 것이 아닌가.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에 그들은 최고의 친절로 우리를 접대하고 있었다. 어차피 품앗이인데 올
여름방학때 이들이 부산을 방문할 시가 덜컥 걱정되었다. 우리가 받은 감동
을 이들에게도 돌려주어야 할 터인데, 결코 금전으로만 해결될 문제는 아니
다.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최상의 접대는 말 그대로 마음이 문제일 것 같
다. 자정이 가까워 숙소에 돌아와서도 우리들은 피곤하여 녹초가 되어버린
이사무를 비롯하여 일본친구들을 기어이 못 가게 막았다. 김치를 안주 삼아
소주몇병을 더비운후 술기운에 우리가 먼저 곯아 떨어져 버렸다.
2001년 1월 22일 - 떠나던 날 가미가제특공대 영정 앞에서 기념촬영.
일본에서의 마지막 아침이다. 누구누구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일행은 숙소를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다. 뜯지 않은 김치와 라면은 잘 포장하여 일본친구
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이고 일본 술과 과자는 기념으로 가져갈 심산으로 잘
구분하였다. 서둘러 세면하고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내눈앞을 가로막는 식당
앞 가미가제특공대의 영정들은 일본인들의 조직력을 상징하는 듯 했다. 친절
한 일본사람 그리고 러일전쟁을 승리하고 중국을 굴복시키고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아시아국가를 식민지화하며 그 여세를 몰아 미국에 선전
포고했던 일본. 패전 후에는 미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그일념하나로 전국민
이 똘똘 뭉쳐 오늘의 경제대국 일본을 만든 그들이 아닌가. 그저 친절하며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저들의 이면에는 세계대전을 일어킬만한 엄청난
조직력이 있는 것이다. 그 상징이 바로 내앞에 걸려있는 가미가제특공대의
영정들이리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서둘러 우리일행은 기념촬영을 한후,
공식 배웅행사를 위해 미조베관 뜰로 내려갔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배웅행사.
우리아이들은 일본친구들과 그 부모들과 함께와 기념촬영을하며 아쉬운 석
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한국측 방문자를 대표하여 본교 교장선생님께서
성대한 환대에 감사했다는 감사의 인사를 했고, 미조베정 교육장의 간단한
배웅사를 마친 후 일본에서의 모든 공식행사를 끝내고 버스에 올랐다. 이사
무와 미조베정 학부형 부대표도 공항까지 배웅하기 위해 함께 출발했다. 버
스가 떠난 후 한참동안도 일본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버
스가 출발한지 30분쯤이 되었을까, 우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버스가 정차하
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10분쯤후 미조베정 학부형대표가 우리들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해뒀던 찻잔을 바치는 예쁜 보자기가 포장된 선물을 뒤늦게
전달해주고 돌아갔다. 그토록 철저한 일본사람들도 이런 틈을 보일 때가 있
구나 생각하니 오히려 정감이 들었다. 아침 8시에 출발한 버스는 12시에 후
쿠오까공항에 도착했다. 공항로비에서 일본사람들이 준비한 도시락을 먹은
후 수속을 준비하는 잠깐의 시간을 이용하여 공항까지 동행해준 일본친구들
과 커피를 마시며 마지막 석별의 인사를 했다. 올 여름 제10차 한일어린이대
사 행사때, 꼭 부산을 방문해달라하며 부산에 오면 오리지널 한국식으로 환
대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부산행 대한항공기에서
부산행 대한항공기가 후쿠오카공항을 이륙하기 시작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의 긴장 탓이었을까. 나른히 근육이 풀어지면서 안도감과 더불어 마음의 평
온이 찾아왔다. 한일 친선 어린이대사 자매학교방문을 목적으로 10명의 배영
초등학교 학생들과 3명의 선생님 그리고 6명의 학교운영위원들이 3박 4일간
가고시마현 미조베정의 3개소학교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편견 없이
그들을 보고오리라던 출발 때의 생각을 떠올려 본다. 역시 그들은 그들 식이
있고, 우리는 우리 식이 있다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무조건 일본을
따라할 필요도 없으며, 무조건 우리 식을 고집해서도 안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일본자동차의 핸들이 우측에 있다해서 그것을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한결같이 친절한 그들의 모습에서, 고속도로와 일반도로 어디에서도 교통순
경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한 그들의 질서의식에서, 단 1분도 어기지
않는 정확한 그들의 시간관념에서,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십자가나
천황의 즉위원년을 사용하며 그들의 정신을 고수하려는 민족근성에서, 몸에
뵌 듯한 검소한 그들의 생활은, 한번쯤 우리가 되돌아볼 문제일 것이다. 그
러나 그들에게선 도무지 개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동일한 상품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이면에 숨어있는 천
황을 중심으로한 무조건적 복종의식을 그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
은 차라리 우리 식의 융통성에 대비되는 단조로움이랄까. 그러나 분명히 느
낄 수 있었다. 국민개개인으로 구성된 그 부품들은 일각의 착오도 없이 조립
되어 일본이라는 거대한 군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이 여기에 이
르자 섬뜩한 전율 감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