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박재삼·시인, 1933-1997)
+ 너, 사랑은
너, 사랑은
단오 솔숲에서
켜켜이 내리는 푸른 솔내음
내 영혼을 깊고 푸르게 흔드는
너, 사랑은
솔내음으로 다가와 눈물 나는 것
(김삼주·시인, 1952-)
+ 단 한 번의 사랑
한 번이면 된다
오직
단 한번
유서를 쓰듯
우레가 치듯
나에게 오라
부디, 사랑이여
와서 나를 짓밟아라
(최갑수·시인, 1973-)
+ 사랑병
기쁨의 고열에 시달리며
가끔은 헛소리도 하는
대단한 몸살
치통처럼
속으로 간직해야 할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화상처럼
깊은 흉터를 남기는
오랜 후유증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대단한 용기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사랑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한가
어떤 것이 사랑인지 궁금한가
나는 가르쳐 주지 못한다
누구도 그 사랑을 말하지 못한다
오직 사랑해 보라
진실로 사랑해 보라
그러면 알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오직 사랑만으로 알 수 있다
(정용철·시인)
+ 복숭아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으로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도종환·시인, 1954-)
+ 사랑이 올 때
그리운 손길은
가랑비같이 다가오리
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
시드는 걸 생각지 않고
술 마실 때
취해 쓰러지는 걸 염려치 않고
사랑이 올 때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봄바람이 온몸 부풀려갈 때
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
오늘같이 젊은 날, 더 이상 없으리
아무런 기대 없이 맞이하고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져도
봉숭아 꽃물처럼 기뻐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리
(신현림·시인, 1961-)
+ 사랑
서울 어느 뒷골목
번지 없는 주소엔들 어떠랴
조금만 방이나 하나 얻고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숨바꼭질 하던
어릴 적 그때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꼬옹꽁 숨어 산들 어떠랴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단 한 사람
찾아 주는 이 없는 들 어떠랴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가난한 우리 들창을 비쳐 줄게다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깊은 산 바위틈
둥지 속에 산비둘기처럼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의지하며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장만영·시인, 1914-1975)
+ 물, 우리의 사랑법
이 여름날
내가 물이 되어 흐르고 있을 때
그녀는 대지가 되어 와 눕는다
그녀를 향해 끝없이 하강하고
그녀의 모든 굴곡을 더듬어
익숙하게 흐를 때
솟구쳐오르는 분수의 말이거나
절정의 높이에서 하얗게 투신하는
폭포의 말이거나
나는 나의 화법으로
그녀 위에 되풀이 쏟아짐으로써
나의 여름은 완성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임하는
우리들의 사랑법
우리 살아가는 일 저와 같아서
이 땅 있음에
사랑은 영원하여라
(김종해·시인, 1941-)
+ 사랑하는 이여, 함께 있으라
존재는 가장 큰 축복이요
함께 있음은 더없는 행복이니
비 오면 비가 와 좋고
별 나면 별이 나 좋고
외진 길인들 어떠리
황토빛 바다인들 어떠리
외진 길에도 잠자리 날고
황토빛 바다에도 갈매기 나는데
사랑하는 이여, 함께 있으라
초록빛 들판에
(김완기·시인, 1938-)
+ 사랑
집을 짓기로 하면
너와 나
둘이 살
작은 집 한 채 짓기로 하면
별바다 바라볼
창
꽃나무 가꿀
뜰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고
네 눈 속에 빛나는
사랑만 있다면
둘이 손잡고 들어앉을
가슴만 있다면
(김후란·시인, 1934-)
+ 어떤 사랑 나라
사랑으로 빚어진 떡,
사랑으로 빚어진 술,
사랑으로 만들어진 안주,
사랑으로 만들어진 바람만 마시고 먹는 나라.
사랑으로 지어진 집,
사랑으로 서 있는 기둥,
사랑으로 자라는 풀잎,
사랑으로 숨쉬는 먼지,
사랑으로 물들어진 종이,
그 위에 사랑의 글씨만 씌어진 나라.
사랑의 밥을 먹고, 사랑의 옷을 입고,
사랑의 국물을 마시고, 기침도 사랑처럼 하는 그런 별나라.
언제나 바뀌지 않는 사랑의 눈빛과 가슴들이 공기처럼 흐르는,
사랑만 숨쉬는 내 누이의 꿈속의 유리알 같은, 그런 먼 나라.
이 지상의 늪에서 보면 언제나 저만큼 가물거리는,
꿈꾸는 내 누이의 꿈속의 먼 나라,
머나먼 저쪽의 불켜진 사랑의 나라.
(이태수·시인, 1947-)
+ 꽃 꺾어 그대 앞에
그대 큰산 넘어 오랜만에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두 눈에
넘치는 눈물 애써 누르며
끝없이 그대를 바라보게 하라
그대 큰 산 넘어 이슬 털고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그대의 발, 머리 풀어 닦으며,
오히려 기쁨에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대를 위하여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양성우·시인,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