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흰 팔이
내 지평선의 전부였습니다.
(막스 쟈콥·19세기 유태계 영국 출신 프랑스 시인)
+ 당신에게
오늘도 당신의 밤하늘을 위해
나의 작은 등불을 끄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별들을 위해
나의 작은 촛불을 끄겠습니다
(정호승·시인, 1950-)
+ 사랑고백
언젠가 불러야 할 이름이라면
이제 당신을 부르고 싶습니다
가슴에 꼭꼭 새겨야 할 사람이라면
이제 당신을 그리고 싶습니다
때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만남으로
때론 우습도록 정겨운 그리움으로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을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지나쳐 가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이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잠시 잠깐 머무르다 갈 사람이 아니라면
이제 당신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때론 아침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보드라운 눈빛으로
때론 머리맡을 쪼는 따가운 태양처럼
강렬한 눈빛으로
이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거스르지 못할 인연이라면
다시는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때론 오래된 친구처럼
때론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그 많은 당신을 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준호·시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어느 날 문득
사랑한다는 말도 하기 전에
이 지상을 떠나가 버리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망설이고 있을 때
내 사랑하는 사람들
문득, 세상을 떠나가 버리고 마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숨차게 계단을 뛰어내려가면,
갑자기 지하철 열차가 문을 닫고
떠나가버리듯
나 혼자 이곳에 남겨 두고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네.
내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사랑한다는 말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떠나가 버리네.
내 사랑하는 사람들.
(박상천·시인, 1955-)
+ 사랑하는 네 속에
혈관 속에
네가 있어 사랑하는
네가 있어
나는 춤춘다
어느 새벽
새파란 가시들 새 발가벗은 탱자 딸 때
수줍은 소리치며 달아나는 너
내 닫혀진 몸을 열고 피는 꽃
기억하니? 너는 내 심장이었다는 것을
내 혈관을 뛰어다니던 피였다는 것을
재가 되어 아득한 뿌리에 다가갈 때까지
붉은 꽃, 사랑하는 네 속에
타오르는 불빛으로 살아
혈관 속에
내가 있어 춤추는
내가 있어
너는 밝다
(채호기·시인, 1957-)
+ 결코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줄 것은, 보여드릴 것은 없어도......
학창시절 선생님 몰래 까먹던 도시락의 달콤함으로
길을 잃어 헤매다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으로
술은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 이리저리 뒤척일 때
술 사준다고 불러내는 친구 녀석의 우정으로,
어제 깜박 잊고 가방에서 꺼내지 않은 우산이
다음 날 비가 와서 필요했을 때의 흐뭇함으로,
계절 바뀐 옷을 꺼내 입었는데
기억도 없는 만 원 짜리 두 장
주머니 속에 들어 있을 때의 행운으로,
열나는 머리를 밤새도록 물수건으로 식히며
두 손 꼭 잡고 체온 전해 주시던
어머니의 고마움까지 모두 합쳐 사랑합니다.
이 모든 걸 빼고도
하늘 닿을 만큼 커다란 그리움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유진하·시인)
+ 그댈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
그댈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
어린애 두 팔 벌려 이만치라 할까요
아아 기껏 고고예요
그러면 그대
湖心에 돌 하나 던져
둥글둥글 퍼져나가는 파문
어디까지 퍼져나가는지 재실 수 있습니까
그댈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
어린애 깡충 뛰어 이만치라 할까요
아아 기껏 고고예요
그러면 그대
여름 높고 푸른 하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봉오리 봉오리 죄다 세실 수 있습니까
(이경하李敬河, 1963.2.9. 동아일보)
+ 사랑을 아는 너는 눈부시다
나는 별 오직 그대만을 지키는 별이기에
항상 어두운 하늘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대가 잠든 시간에도
홀로 하늘에서 빛나고
깨어 있는 시간에도 그대를 환하게 비춥니다
하지만 그 빛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내 영혼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기에 이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사랑을 아는 그대
그대를 보고 싶다는 말은 안 해도
마음속으로 전해오는 그 느낌이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별빛은 세상을 가득 채우고
그 빛은
그대를 보고 싶은 내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움에도 얼굴이 있다면
나는 그 얼굴을 비추고
두 손을 내밀어 만지고 싶습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대의 사랑은
얼마나 섬세한 것일까요
나는 눈을 감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아는 눈부신 그대를
(송시현·시인)
+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승려 시인, 1879-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