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고백 시 모음> 이해인의 '황홀한 고백' 외 + 황홀한 고백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당신의 꽃 내 안에 이렇게 눈이 부시게 고운 꽃이 있다는 것을 나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이에요 당신에게 나는 이 세상 처음으로 한 송이 꽃입니다 (김용택·시인, 1948-) + 꽃·22 나에게 꽃이 있었다 어느 별 어린 왕자처럼 매일매일 물을 주고 항상 바라봐줘야 하는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양해남·시인) + 온 누리에 가득한 당신 깊은 산 계곡의 파란 바람꽃 되어 머언 먼 바다의 하얀 파도빛 되어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산도 바다도 다 사라지고 온 누리 가운데 당신만이 가득합니다. (공석하·시인, 1941-) + 샘 영암지서 관사 양철 지붕 아래 검은 동굴 같은 샘 하나 있습니다 어쩌다 찔레꽃잎 하나 떨어뜨리면 잔잔한 물무늬가 꽃속보다 깊고 검은 하늘 찰랑거리며 흰 별로 뜹니다 내 안에 그대가 꽃잎으로 내려 잔잔한 무늬 하나 그을 때까지 참 맑은 샘물로 가슴 흐리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이승범·시인, 1956-) + 고백 이젠 잊읍시다 당신은 당신을 잊고 나는 나를 잊읍시다 당신은 내게 너무 많아서 탈 당신은 당신을 적게 하고 나는 나를 적게 합시다 당신은 너무 내게로 와서 탈 내가 너무 당신에게로 가서 탈 나는 나를 잊고 당신은 당신을 잊읍시다 (이생진·시인, 1929-) + 당신 한 번도 닿지 못했던 땅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여전히 처녀림인 곳 반평생 항해 끝 한쪽 발이 먼저 밟은 땅 되돌아갈 길 없이 가죽끈도 없이 꽁꽁 내가 묶인 땅 단 한 번의 애무로 빛과 그늘 속 아무도 모르게 나를 숨긴 당신 (서종택·시인, 1948-) + 사랑한다는 말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 속엔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이 들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사랑 받는다고 하는 말 속엔 햇빛처럼 가득한 따뜻함이 들어 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누가 누구를 한없이 기다린다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예쁜 가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보다 예리한 아픔은 없다. (김재진·시인, 1955-) +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빡깜빡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퉁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통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정끝별·시인, 1964-) + 숨은 꽃 제일 처음 발견한 자에게만 하나의 커다란 놀라움이 되고 싶어 나는 항상 숨어 사는 꽃이어요 가까이 다가와 허리 굽혀 들여다보는 자에게만 흐뭇한 위안이 되고자 나는 언제나 숨죽이고 있는 향기여요 애써 찾는 자에게만 그 눈에 뜨이고 싶은 나는 제일로 키 작은 꽃이어요 아주 미미한 죄끄만 꽃이어요 그러나 나는 또 늘 눈뜨고 있는 꽃이어요 아, 나는 당신에게서만 이름을 지어 받고 싶은 그래서 아직은 이름도 갖지 못한 꽃이어요 (김혜숙·시인, 1937-) + 콕 찍어서 너만 사랑해 바닷물이 이리도 많고 파도가 넘실대 모래사장을 덮어 버려도 단 한 모금의 물을 마실 수 없잖아 많고 많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찾을 필요도 없는 것처럼 오직 너 하나만 있으면 되거든 콕 찍어서 너 하나만 사랑할 거야 많아도 안 되고 넘쳐도 안 되는 것처럼 세상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 콕 찍어서 너 하나야 콕 찍어서 너만 사랑해 (류경희·시인) + 내 목숨꽃 지는 날까지 내 목숨꽃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 아무런 후회 없이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겨우내 찬바람에 할퀴었던 상처투성이에서도 봄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이 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 내 마음도 마음껏 풀어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 한동안 모아두었던 그리움도 꽃으로 피워내고 싶습니다 행복이 가득한 꽃향기로 웃음이 가득한 꽃향기로 내가 어디를 가나 그대가 뒤쫓아오고 내가 어디를 가나 그대가 앞서갑니다 내 목숨꽃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 아무런 후회 없이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애처롭기까지 만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님과 함께 즐거워하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한용운·시인, 1879-1944) + 소네트·43 나의 눈은 낮에는 허술하게 세상을 보고 밤이면 가장 잘 봅니다. 잠이 들면 꿈속에서 당신을 알아보아요. 어둠 속이라 해도 내 눈은 빛을 받는 곳으로 향하게 되어요. 당신의 그림자가 어두움을 드리워도 그것만으로도 그늘을 빛나게 합니다. 한밤중 깊은 잠에 빠져 장님 같은 눈이 되어도 아름다운 당신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여요. 이럴진대 대낮에 당신을 본다면 내 눈은 얼마나 황홀할까요. 내가 당신을 보기 전에는 낮은 밤이에요. 꿈에 당신을 본다면, 밤조차도 밝은 낮이 되어 버리니까요 (윌리엄 셰익스피어·영국 시인, 1564-1616) +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을지라도 나는 당신 곁에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입이 없어도 나는 당신에게 애원할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더듬어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멈추어 주십시오 나의 뇌가 맥박 칠 것입니다. 만일 나의 뇌에 불이라도 사른다면 나는 나의 피로써 당신을 운반할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체코 시인, 1875-1926)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