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시 모음> 이상국의 '감자떡' 외 + 감자떡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물에 수십 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아직도 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쪄서 우리를 먹이신다 (이상국·시인, 1946-) + 감자 올망졸망 감자 식구는 많기도 해 깜깜한 땅 속에서 하나라도 잃을까 봐 꼭꼭 손 잡았네. 뿌리 맨 끝에 숨은 아기 감자까지도 손 놓칠까 꼭 쥔 그 마음 땅 속의 일이라고 아무도 모를까 가득 찬 감자밭 웃음이 저렇게 꽃으로 피는 걸. (민현숙·시인) + 감자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야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아버지 주먹만이나 하구나. 올 같은 가뭄에 어쩌면 이런 감자가 됐을까? 할머니는 무슨 재주일까? 화롯불에 감자를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 저녁 할머니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머리털이 허이연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내 주신 감자는 구워도 먹고 쪄도 먹고 간장에 졸여 두고두고 밥반찬으로 하기로 했다. (장만영·시인, 1914-1975) + 썩은 감자 아이고, 냄새야 에이, 더러워라 벌레 생긴 것 좀 봐 썩은 감자 버리고 오는데 파리는 자꾸 나만 따라다닌다 (도종환·시인, 1954-) + 감자의 기억 참 못났다 울퉁불퉁한 감자 껍질 벗기다가 못난 마음을 긁어댄다 넘치는 계곡물이 비탈진 감자밭을 덮칠 때 허옇게 몸을 드러낸 감자의 기억을 끌어낸다 갈무리되었던 실패한 사랑이 몇 알의 화석으로 출토되어 무딘 빛살에도 눈부셔한다 뜨거운 감자를 집어든 엄지에 닳아빠진 지문이 빗소리가 끊이지 않는 여름 하얗게 분이 난 기억을 먹는다 (목필균·시인) + 비 오는 날에는 감자를 삶는다 오늘같이 장맛비 오는 날에는 감자를 삶았지 다 닳아빠진 감자숟가락으로 껍질을 깎고 신화당 물에 타서 살살 뿌리고 백철솥에서 감자를 삶는다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젓가락으로 찔러보고 또 찔러보고 감자는 벌집이 되었지 장맛비 쉼 없이 내리는 휴일 낮 마루에 앉아 창 밖을 보고 있노라니 뜨거운 감자 호호 불며 먹던 그 시절이 그리워 함께 둘러앉아 감자 먹던 식구들이 그리워. (이문조·시인) + 씨감자 파종 잘려 토막난 씨감자를 본다 하얀 살내음 풍기며 다소곳한 눈 하나 우리네 가슴은 오래 전부터 불이 나고 타다가 타다가 바람불면 잿빛 하늘로 남는데 어디로 가려고 하얀 재로 옷 해입었나 오월 마른 햇살이 밭이랑 위로 무수한 칼질을 해도 하나가 열로 통하는 그날을 위해 이른 봄, 오늘은 파종을 한다 (권경업·산악인 시인, 1948-) + 감자를 깎으며 검은 비닐봉지가 주둥이를 열자 자줏빛 싹이 난 감자가 쏟아져나왔다 섣불리 불려나온, 환한 세상을 향한 강한 불신을 담은 눈빛들이 노려본다 성난 뿔 같다 울컥울컥 빈속에 들이켰을 바람의 향기가 아리다 거무튀튀한 흙빛을 띠고 쭈굴텅해진 몸뚱아리 어디, 저리 희멀건 속살 감추어 두었을까 쓸쓸한 앙금들 가라앉고 부유하던 속앓이로 홀로 여위어갔을 어둠 속 즐겁게 굴러가던 짱짱한 울음 하나가 허벅지 깊숙이 지뢰를 묻듯 조심조심 독을 심고 허공의 길 향해 무섭게 싹을 틔웠던 것 껍질을 벗긴다 그는 순순히 성난 뿔을 거세당한다 허옇게 드러나는 비의(悲意), 붉은 피가 스민다 성난 뿔을 잘라내고 그가 걸어간 마음의 유적 은밀한 흔적까지 도굴하려다 검지손가락을 베인 것이다 문득 몸속 길 하나가 들어선다 퍼져나가는, 감자의 독 (강해림·시인, 1954-) + 씨감자와 어머니 겨우내 차가운 헛간에서 수분이 빠져나간 감자 산후産後 내 어머니의 아랫배를 닮았다 배꼽 같은 감자눈을 밤톨 크기로 도려낸다 감자 씨눈 쪽으로 여리고 푸르스름한 싹이 탯줄처럼 뻗어나 와 있다 그 탯줄을 움켜잡은 내 어린 눈빛 새순을 틔울 기세로 촉촉하게 빛이 난다 남은 것은 칼 댄 부위가 덧나지 않도록 재로 잘 버무려 밭고랑에 드문드문 심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고른 흙 한 줌 하얗게 삭아갈 아픔에 엷게 덮어주고 나면 토실토실한 햇감자들 유월 뜨거운 햇볕에 밟혀 멍든 뿌리에 우르르 다시 눈뜨는 것도 보인다 봄날, 비릿한 풀 냄새 맡으며 씨감자의 몸을 가른다 어머니의 산통을 가른다 내 질긴 탯줄을 잘라낸다 (남정·시인, 경남 하동 출생) + 감자 감자는 밭에서 익고 탕솥이나 찜솥에서 또 한 번 익는다. 밭에서든 솥에서든 잘 익은 감자는 뭇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밭에서 제대로 자라지 않거나 채 익기도 전에 썩어버리는 감자만큼 농부에겐 볼썽사나운 것이 없다. 밭에서 잘 익고 솥에서도 푹 익은 감자보다 더 멋 나는 감잔 없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즈음 세상을 어서 보고 싶기라도 한 듯 밭이랑을 부지런히 파헤치고 솟아오른 감자잎들 사이로 눈송이처럼 하이얗게 핀 감자꽃을 바라보면, 어딜 가서 감자다운 감자 한 번 정말 배불리 먹고 싶어질 때 있다. 잎마름병이며 가뭄이며 갖은 고비 다 이겨내고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빛깔 좋고 탱글탱글한 모습으로 식탁에서 날 뜨겁게 반겨줄 감자다운 감자가 때론 그리워진다. (안재동·시인, 1958-) + 감자밭에서 토실토실 햇감자 복스러운 보조개 수줍은 새색시 연지 볼 닮았네 허기진 가슴에 북을 돋우고 알알이 여물어 주렁주렁 열린 지지고 볶고 호호 불면서 인정이 익어가는 시골의 풍경 구수한 굴뚝연기 피어오르네 어서 가자 빨리 가 해 저문 밭고랑에 금 방울소리 (김옥자·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