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에 관한 시 모음> 문정희의 '벌레를 꿈꾸며' 외 + 벌레를 꿈꾸며 한번쯤 벌레를 꿈꾼 적이 있다면 이제 책벌레보다 애벌레가 되고 싶네 검은 활자를 갉아먹고 홀로 꿈틀거리며 집 한 채도 짓지 못하는 책벌레보다 휘청거리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초록 잎을 뗏목 삼아 하늘을 기어가는 애벌레가 되고 싶네 돈벌레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겁이 나고 열매란 열매는 죄다 먹어치우고 모든 곳에 구멍을 뚫어놓는 식욕도 두려워 한번쯤 벌레를 꿈꾼 적이 있다면 이제 애벌레가 되고 싶네 결국 사랑하는 이의 심장 속에 사는 작고 아름다운 각시별 같은 (문정희·시인, 1947-) + 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에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시인, 1929-) + 개똥벌레 저만이 어둠을 꿰매는 양 꽁무니에 등불을 켜 놓고 달고 다닌다 (윤곤강·시인, 1909-1949) + 자벌레 순례의 길을 가는 라마의 선승처럼 어느 성지를 향해 그리 바삐 가시는지 가사도 걸치지 않은 저 푸른 맨몸 일보궁배(一步弓拜)* 일보궁배(一步弓拜) (임보·시인, 1940-) * 일보궁배(一步弓拜): 매 걸음마다 활처럼 온몸을 굽혀 하는 절. + 양말 양말을 빨아 널어두고 이틀만에 걷었는데 걷다가 보니 아, 글쎄 웬 풀벌레인지 세상에 겨울 내내 지낼 자기 집을 양말 위에다 지어 놓았지 뭡니까 참 생각 없는 벌레입니다 하기사 벌레가 양말 따위를 알 리가 없겠지요 양말이 뭔지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집짓기가 급해서 이것저것 돌볼 틈이 없었겠지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양말을 신으려고 무심코 벌레집을 떼어내려다가 작은 집 속에서 깊이 잠든 벌레의 겨울잠이 다칠까 염려되어 나는 내년 봄까지 그 양말을 벽에 고이 걸어두기로 했습니다 (이동순·시인, 1950-) + 3mm의 산문 운동장을 거닐다가 땅바닥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쭈그려 앉았습니다. 3mm나 될까, 연둣빛 투명한 아기 벌레였습니다 여치인지, 방아깨비인지, 얼마나 여리고 작고 그 빛이 순정하던지, 너는 어디서 왔니? 너는 어디서 왔어? 물어 봅니다. 나는 너무 크고 벌레는 너무 작아 도저히 눈 맞출 수 없어 나의 말이 그 벌레에게 닿지 않아 그의 답을 듣지 못합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려 벌레를 따라갑니다 바람이 붑니다. 내 눈이 푸르게 물들어오는 이 저녁. (김용택·시인, 1948-) + 굼벵이 길을 가는데 굼벵이 한 마리가 발길을 가로막는다 어린 굼벵이 뱃살을 둥글게 말았다 풀었다 온몸으로 길을 밀고 있다 한 발 한 발 걷는 서툰 걸음마 저 느린 걸음 속에는 날개 한 쌍이 숨어있다 하늘을 날기까지 그는 바닥을 기어야한다 장난기가 동해서 손으로 슬쩍 건드리는 순간, 둥글게 몸을 말고 죽은 척 꼼짝도 않는 굼벵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지만 흙더미로 옮겨주었다 움츠린 몸을 풀고 숲을 향해 꿈틀꿈틀 기어가는 굼벵이의 저항은 침묵이다 변태를 하기까지 날개를 보여주지 않는다 (곽문연·시인, 충북 영동 출생) + 바퀴벌레 우리는 상자 속에 모여서 산다 너희들보다 훨씬 오붓하게 모여 산다 우리 선조들이 우리들에게 선물해 준 원시적인 소화력을 믿고 독약을 삼켜도 사고 때마다 여럿의 발로 또르르르 달려가 이마에 물을 적셔 동료들을 깨우기도 하지만 아예 일어나지 않는 동료들은 서로서로 다리를 붙잡고 날라다가 단단한 부리를 가진 날짐승, 길목에 놓아 장사 지내고 환장할 풍장을 치며 개칠분칠똥칠 하여 비문을 새겨 남긴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가장 강인한 정신으로 우리들 부족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므로 우리들 후손의 귀감이 될 것이므로 (임영봉·시인, 1959-) + 벌레 하나 벌레 하나 나무 등걸을 타고 오른다 추락, 몸이 뒤집히는 몸부림 아픔 딛고 다시 기어오른다 재도약의 악전고투 세상이 이렇게 미끄러울 줄이야 삶의 벼랑 끝 끄나풀 하나 없는 맨 몸으로 버티어 오르는 저 끈적한 인내 푸르름 찾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미물의 결단을 대수롭게 지켜본다 푸른 잎새에 기어이 올라앉은 벌레 하나 사각사각 갉아먹는 뼈를 깎는 세상 소리를 듣는다 (박덕중·시인, 1942-) + 개똥벌레에게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세상의 빛이 되었던 너를 그린다. 그렇게 별처럼 초롱초롱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제 그런 방식의 사랑은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네가 사라진 들판은 피비린내만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럴듯한 이름의 가면을 쓰고 종교를 말하면서 테러를 하고, 정의를 말하면서 전쟁을 한다. 목숨이 우수수 지는 가을의 길목에 서서 오래 전 여름밤에 수줍게 반짝이던 네 이름을 생각한다. 개 똥 벌레 오늘에서야 알겠다. 왜 네가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던 종교, 이념, 민족, 사상, 문화, 예술....이 아닌가를, 사랑이 아닌가를, 시가 아닌가를. 정작 개, 똥, 벌레만도 못한 우리들을 피해 무주 구천동 어디엔가에 숨어 지낸다는 네가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그리웁구나. (김동찬·시인, 1958-) + 몸 속의 벌레 언제부터 내 몸 속에 그리 많은 벌레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동그란 집 짓고 죽은 듯 살아 있는, 어쩌다 수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며 교미하고 배설하고 끝내 가슴을 숭숭 구면 뚫어 놓았을까 사그락사그락 가슴살 파먹는 소리 뼈 갉아먹는 소리 벌레 벌레 벌레들이 뇌수 빨아먹는 소리, 이제 내 몸은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소름끼치는 벌레들의 집이 되어버렸다 욕망의 벌레가 알을 낳고 이성의 벌레가 새끼 벌레를 키운다 언제 어디서나 지칠 줄 모르고 꿈틀대는, (주용일·시인, 1964-) + 벌레의 노래 세상에 이름을 빛내는 무엇 되기를 꿈꾸지 않으리 온몸으로 온 정성으로 제 갈 길 말없이 기어가는 저 낮고도 낮은 오체투지(五體投地) 세상의 모든 벌레들처럼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내 발길 닿는 지상의 모든 길을 사랑하고 그 길에서 만나는 누구든지 뭐든지 미워하지 않고 이따금 파란 하늘과 저 멀리 지평선도 바라보며 단출한 몸 가벼운 마음으로 바람이나 구름같이 한 생 흐르다 가면 좋으리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