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을 나설 때마다
꼭 한 번은 몸 기우뚱거린다
신발을 제대로 꿰지 못한다
신발을 꿰어 신고 밖으로 나아가
바람 앞의 나무로 사는 것이
내 운명인데,
운명은
그토록 더디게 익숙해지는 것일까
기우뚱거리며 생을 가늠해 보는
이 아침의 의식
바람 앞에 나무로 서는 연습,
(이진숙·시인, 1955-)
+ 신발 한 짝
진흙 털고,
먼지 털고,
해진 신발을 깁는다.
풀꽃을 밟았을까.
이슬냄새가 난다.
벌레를 밟았을까
쇠똥냄새가 난다.
돌멩이에 챈 신발 한 짝,
살아 숨쉬는 동안
신발을 벗을 수 없었다
잠시 휴식도 잊은 채
넓고 좁은 길
앞만 보고 걸었다
황금 구두 신고
걸어본 길도 있었고
하얀 운동화 신고
걸어본 길도 있었고
찢어진 고무신 끌고
걸어본 길도 있었다
신발이 바뀔 때마다
발걸음 무겁고 고달팠으니
맨발로 걸을 때가
가장 편하여
기쁨의 노래 한 소절 불렀었다
그러나
그 구간
황혼에 이르러
너무나 짧은 거리였으니
길을 걷다 불편하거든
무거운 신발 벗어던져라
(손희락·시인, 대구 출생)
+ 아내의 신발
현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뒷굽이 삐딱하게 닳아빠진
아내의 신발
못난 신발이지만
나에겐 가장 푸근한 신발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내의 신발이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내의 신발이 보이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고 우울하다
내 마음의 안식
아내의 신발
언제까지 저기 저 자리에
놓여 있을까
아내의 신발이 사라지는 날
슬픈 그날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불안한 마음에
현관에 놓인
아내의 신발을
몰래 가만히 만져 본다.
(이문조·시인)
+ 신발
당신의 육중한 몸
늘 함께하며
싫든 좋든 살아온 날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눈이 오거나 한파가 몰아쳐도
당신이 가는 곳 어디든지
불평 한마디도 없이
따라나선 길
밤이면
당신의 부르튼 발
당신의 고된 하루
희망찬 내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함께한 시간
정이 깊어갈수록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발 밑 낮은 자세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헌신짝처럼
아무렇게나 내버려져도
원망도 않겠습니다.
그것이 제 운명인 걸요.
(이제민·시인, 충북 보은 출생)
+ 신발장 앞에서
세월에 찌든 내용물
산뜻한 포장지로 감춘 채
성장을 하고 나서다가
현관에 멈춰서면
내 자존심보다
콧대 높은 구두 굽
바라보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어 허리가 아프다
내 작은 키만큼
낮은 구두 굽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게 살라는 가르침인가
(안숙자·시인)
+ 아기 신발 가게 앞에서
세상 살맛
무척이도 없는 날은
길거리 아기 신발 가게를 찾아가
유리창 안에 갇혀진
아기 신발들을 바라본다
조그맣고 예쁘고 고운 아기 신발들에
담겨질 만큼의 사랑과 기쁨과
세상 살 재미들을 요량해 본다
저 신발의 임자는 누구일까 …
저 신발을 신고 걸어다닐
조그맣고 보드라운 맨발을 가진
어린 사람은 누구일까 …
유리창 너머 풀밭 사잇길로
아기가 웃으며 걸어온다
아기는 구름 모자를 썼다
아기는 바람의 옷을 입었다
아가, 이리 온
소리내어 부르자 아기는 사라지고
차디찬 유리창만이 내 앞을
막아설 뿐.
(나태주·시인, 1945-)
+ 지체 높은 신발
이 신발은 디자인이 좋으세요
가격도 좋으시고 이만한 품질도 없으세요
여종업원이 그칠 새 없이 진열장 앞에서 침을 튀긴다
어쩌다 신발이 저리 지체 높은 대접을 받을까?
평생 사람을 이고 다닐 것이기 때문일까?
늘 낮추고 험한 곳 먼저 살대며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갑자기 나도 저 신발처럼 진열장에 놓이고 싶다
평생 짓밟히고 짓눌리더라도
지체 높은 저 신발처럼 대접 한번 받고 싶다
(최범영·시인, 1958-)
+ 구름의 신발
한 무리의 구름이 간다
그림자에 갇힌 내게도
구름 속이 훤히 보인다
보드란 맨발이 보인다
구름의 신발은 어디 있을까
더 넓게 더 높이
가끔씩 소멸의 시간처럼
구름 사이로 잔광이 쏟아진다
내 삶의 무게를
하늘에 걸어두고
구름의 신발을 신겨 주고 싶다
(차수경·시인, 충남 서산 출생)
+ 신발
잔잔한 꽃무늬가 예쁘게 놓여 있는
뒤꿈치가 훤한 천으로 된 신발
예뻐서 샀는데
너무 커서 신을 수 없다며 얻어 신은 나의 발
내 삶의 동반자로 몇 년을 함께 하며
찢어지고 터지는데도
왠지, 아까워서 버릴 수 없다
본드로 덧칠 불품없어도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타며
수없이 들락거렸던
서울 나들이
때로는 재빠른 걸음에 발을 접고
뒤뚱거리다 터지지 않을까 염려하며
하얗게 발라진 본드의 힘으로
한 번의 실수 없이 잘도 견디었다
강원도에 이사 오던 날
가속기 페달을 밟으며 함께 왔고
한차례 비 오는 날
서울 나들이 함께 한 신발
정이 들어 버릴 수 없다
(김귀녀·시인,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