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시 모음> 이생진의 '하늘로 가려던 나무' 외 + 하늘로 가려던 나무 나무가 겁없이 자란다. 겁없이 자라서 하늘로 가겠다 한다. 하지만 하늘에 가서 무얼 한다 갑자기 허탈해진다. 일요일도 없는 하늘에 가서 무얼 한다 나무는 그 지점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생진·시인, 1929-) + 나무 나무는 길을 잃은 적이 없다 허공으로 뻗어가는 잎사귀마다 빛나는 길눈을 보라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나무의 마음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쉬고 뜻이 있고 정도 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꺾으면 눈물 흘리죠 꽃 피고 잎 퍼져 향기 풍기고 가지 줄기 뻗어서 그늘 지우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사람은 찾아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쳐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고 자라나 집집이 기둥 들보 되어주지요 나무는 사람 마음 알아주는데 사람은 나무 마음 왜 몰라주오 나무와 사람은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오 (이은상·시조시인, 1903-1982) + 하늘에 바람을 걸고 나무와 인사를 하면 저 사람 미쳤다고 수군거린다. 나무를 알고 싶어 나무와 얘기를 나누면 저 사람 헛소리한다고 고개를 흔든다. 없는 것을 본 것이 아니고 안 보이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 무슨 죄인 만난 듯 돌아서 버린다. 머지않아 보이는 것은 사라지고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날 하늘에 바람 하나 걸고 산 삶이여 행복하여라, 그날을 기다리던 시간들은. (김형영·시인, 1945-) + 내가 돌아보면 내가 돌아보면 나무도 나를 돌아본다 내가 돌아보면 나무의 새도 나를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새는 훌쩍 날아간다 해칠 생각은 아예 없었는데 다시 걸음을 옮기자 나무는 시종 나를 지켜본다 나도 시종 나무를 지켜본다 (신동집·시인, 1924-2003) + 나무 안의 절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이성선·시인, 1941-2001) + 나무가 보채다 나무가 마음을 열어 날개를 단다 나무는 나이를 먹어도 변함없다 때가 되면 마음을 열어 제 길을 펼친다 느티나무 아래서는 행복하다 나무의 마음에 사로잡힌다 고마움 속에 파묻혀 보지 않았으면 사랑을 말하지 마라 세상의 어느 풀, 어느 나무가 기도 없이 제 마음을 열겠는가 연두의 보챔, 그것은 나무의 마음이 열리는 떨림이다. (박창기·시인, 1946-) + 나무의 정체 장작을 태워보고 알았다 나이테는 한 겹 한 겹 쌓인 세월이 아니라 켜켜이 잠재운 불이었음을, 온몸의 잎들을 집열판처럼 펴서 해해연년 봄부터 가을까지 그가 열렬히 흠모한 태양이었음을, 마침내 땅에 묶인 저주를 풀고 하늘 향해 회오리치는 자유의 혼이었음을 장작을 태워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조동화·시인, 1949-) + 나무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황인숙·시인, 1958-) + 야누스의 나무들 몸의 반쪽은 봄을 살고 몸의 반쪽은 겨울을 산다 꿈의 반쪽은 하늘에 걸어두고 꿈의 반쪽은 땅속에 묻어둔다 마음의 반쪽은 광장이고 마음의 반쪽은 밀실이다 생각의 반쪽은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반쪽은 잎새들을 지운다 집의 반쪽은 감옥이고 집의 반쪽은 둥지이다 (이경임·시인, 1963-) + 나무 숲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를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곽재구·시인, 1954-) + 나무들의 이력서 휴양림 산책길에 숲 해설가의 나무 사랑은 서사시를 쓰게 한다 상수리 열매가 묵이 되는 이야기야 식탁에 녹아있지만 찰피나무로 묵주와 염주를 신갈나무로 짚세기를 굴피나무로 백 년 굴피 집을 떡갈나무로 방부제를 만드는 나무들의 이력서 출생의 비밀을 솔잎 걸어 신고하고 이 세상 떠나는 날 소나무 관속에 누워 작별하게 하는 나무들의 이력서는 장편의 서사시다 (전길자·시인, 서울 출생) + 팽나무 나이가 들면서 나무는 속을 비우기 시작했다 한때는 가지 끝마다 골고루 영양을 져 나르던 줄기는 나이가 들면서 안에서부터, 평생을 두고 하나씩 둘씩 힘겹게 그어온 나이테 지워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속 텅 비운 채 꼿꼿이 선 자세로 나무는 그 길고 오랜 여정을 마감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팽나무처럼 속 비우고 싶다 (이재무·시인, 1958-) + 나무와 장작 수해水害 때 뿌리 채 뽑혀 산에서 쓸려온 나무를 모아 한겨울 밤 불을 지핀다 다다닥, 탁 훌훌, 훨훨 난로 속에서 악기소리가 난다 낯설지 않은, 그러나 한번도 마음 기울여 본 적 없는 저 소리 가만히 난로 속을 기웃거려본다 신기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송장뿐인 저것들이 이제야 장작더미에 쌓인 겨울 햇살을 풀고 제 몸 기억의 모든 숨결을 벗고 다시 산이 되고 나무가 되어 떠나는 불길 밟는 발자국 소리 훌훌 훨훨 다다닥, 탁 (김명기·시인, 1969-) + 나무의 생애 비바람 드센 날이면 온몸 치떨면서도 나지막이 작은 신음소리뿐 생의 아픔과 시련이야 남몰래 제 몸 속에 나이테로 새기며 칠흑어둠 속이나 희뿌연 가로등 아래에서도 고요히 잠자는 나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목숨의 중심처럼 지키면 그뿐 세상에 반듯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서도 햇살과 바람과 이슬의 하늘 은총 철석같이 믿어 수많은 푸른 잎새들의 자식을 펑펑 낳는다 제 몸은 비쩍 마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른 것들과 늦가을 찬바람에 생이별하면서도 새 생명의 봄을 기약한다 나무는 제가 한세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