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평화를 위한 시 모음> 고진하의 '연꽃과 십자가' 외 + 연꽃과 십자가 벽이 허물어지는 아름다운 어울림을 보네 저마다 가는 길이 다른 맨머리 스님과 십자성호를 긋는 신부님 나란히 나란히 앉아 진리의 법을 나누는 아름다운 어울림을 보네 늦은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아름답네 자기보다 크고 둥근 원에 눈동자를 밀어넣고 보면 연꽃은 눈흘김을 모른다는 것, 십자가는 헐뜯음을 모른다는 것,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는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는 것,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라는 것 늦은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귀하다네 늦은 어울림이라도 어울림은 향기롭네 이쪽에서 '야호!' 소리치면 저쪽에서 '야호!' 화답하는 산울림처럼 이 산 저 산에 두루 메아리쳐 나가면 좋겠네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다 행복하라 며칠 동안 펑펑 눈이 쏟아져 길이 막힐 때 오도 가도 못하고 혼자서 적막강산에 갇혀 있을 때 나는 새삼스럽게 홀로 살아 있음을 누리면서 순수한 내 자신이 되어 둘레의 사물과 일체감을 나눈다. 그리고 눈이 멎어 달이 그 얼굴을 내밀 때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의 그 황홀한 경지에 나는 숨을 죽인다. 살아 있는 모든 이웃들이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법정·스님, 1932-2010) + 당신 가시기 며칠 전 풀어 헤쳐진 환자복 사이로 어머니 빈 젖 보았습니다 그 빈 젖 가만히 만져보았습니다 지그시 내려다보시던 그 눈빛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처연하고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으니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도 내가 다시 매달려 젖 물고 싶은 당신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 (복효근·시인, 1962-) + 마당 - 송광사에서 여기도 하느님 마을 한 귀퉁이 흙마당에 봄비가 다녀가고 있다 몇 개 발자국들도 다녀갔다, 누구의 것일까 하느님은 발자국 깊이를 보고도 이 세상 마당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안다 마당을 나서는 우리 일행을 보고 너희들이구나 하며 후박나무 옷섶의 빗방울을 내려 어깨를 툭툭 쳤다 하느님이 오늘 보신 내 발자국은 어떨까. (박두순·시인, 1950-) + 곤충의 종교 곤충 그들은 산에 절을 세우지 않는다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다 일요일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책을 끼고 다니는 일도 없다 모두 공부를 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을까 나는 산에 오면 그런 것을 배운다 (이생진·시인, 1929-) + 밭 한 뙈기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느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되고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권정생·아동문학가, 1937-2007) + 행복해진다는 것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은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헤르만 헤세·독일 시인이며 소설가, 1877-1962) + 종교적 신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종교적 신조는 실재의 진술이 아니라 한 암시, 인간의 사고가 못 미치는 저편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한 실마리입니다. 요컨대, 종교적 신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그 손가락 연구에서 넘어서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손가락을 빨기에 열중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손가락을 써서 자기 눈을 후벼냅니다. 이들은 종교로 말미암아 눈먼 고집쟁이 맹신자들입니다. 그 손가락에서 충분히 떨어져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는 그런 종교가는 참으로 드뭅니다. 이들은 신조를 넘어가 버렸기에 신성모독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인도 영성가, 1931-1987) + 신에 대한 생각 모든 이에게 있어 신에 대한 생각은 서로 같지 아니합니다. 아무도 타인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칼릴 지브란·레바논계 미국인 시인, 1833-193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