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시 모음> 김시종의 '라일락' 외 + 라일락 라일락, 나는 너의 향기를 먼저 알았다. 네 이름보다… 사 반세기 전, 젊은 날 문경중 교정에서 너의 향기에 끌려, 가까이 가서 너를 처음 만났다. 숨겨진 여학생 이름표 같은 네 가슴의 명찰을 확인했다. 아늑한 봄 나절, 조그만 미물인 벌들도 향기론 네 꽃 그늘 아래서, 삶의 송가(頌歌)를 복에 겨워 부른다. 나도 좋이 네 향기에 취해, 진복(眞福)을 누린다. 라일락! 나의 樂! (김시종·시인, 1942-) + 라일락꽃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도종환·시인, 1955-) + 라일락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들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라일락 봄이 두터운 외투 속에 움츠리고만 있던 그 오월 줄 수 있었던 아름다움은 오직 그것뿐이었을 때의, 눈감고 업은 내 아이와 오래도록 서있던 친정으로 가는 샛길 라일락 나무 구겨진 마음 풀어내 햇살 풀먹여 푸우우 품어내던 향분 옥양목 같은 생(生)의 강가 사금처럼 반짝이는 (강은령·시인, 1930-1993) + 라일락꽃 그늘을 지나며 스칠 때마다 오래 전 잊었다고 생각한 내밀한 열정 제자리에 서있어도 멀리 가는 향기 라일락, 이미 누군가의 연인 같은 너의 이름 속을 들어가면 전설보다 아름다울까 라일락하고 부르면 라일랄라 음표가 튀어나오고 라일락하고 부르면 하얀 꽃관을 쓴 그녀가 꽃가루를 뿌리며 나타날 거야 이윽고 다시 널 부르면 거짓말처럼 다시 바람이 불어와 숨막힌 사랑을 던지고 가리라 (도혜숙·시인, 1969-) + 라일락 향기 달빛은 온 밤 길에 라일락 향을 뿌려 놓았다 골목 옆 집집마다 불꺼진 창 틈에도 향기를 밀어 넣는다 라일락 향은 내 머리카락에 배어 골목 어귀까지 따라 오다 달의 손에 끌려갔다 나는 사월의 밤아, 밤아, 하고 눈부신 라일락나무 아래서 그리움을 부른다 (장미숙·시인) + 늙은 라일락을 위하여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한 스물 두어 해 전이다 나도 그녀도 파랗던 시절이었다 꽃사과나무 곁에 늘 수줍은 듯 서 있어 온 그녀 이제는 등도 굽고 다리도 휘어져 어느 땐 내가 나의 등으로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받쳐보기도 하는데 그녀가 엽서 같은 푸른 잎들을 매달고 보란 듯이 꽃향기 뿜어낼 때면 그녀의 봄밤은 여전히 황홀하기만 하여 그 밑에서 취하고 또 취하고 그러면 그녀는 달보다 더 환한 얼굴로 걸어와 내 목덜미를 쓸어 내리는 것이다 숨이 하얘지도록 하얘지도록 (김정희·시인) + 라일락 꽃 사랑의 시련을 가슴에 안고 애절한 눈빛으로 연한 바람에도 하늘거리며 눈물을 펑펑 쏟는 여인아.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고통이 머리끝까지 차올라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어 처연한 몸짓이 더욱 가엽구나. 시퍼렇게 멍든 가슴이 숨 쉴 때마다 呻吟이 되어 보랏빛 아픔을 토하며 옷깃을 물들이고 있구나. 툭 치면 스러질 것만 같아 붙들어 주고 싶게 하는 애처로운 네 모양에 어느새 내 마음은 무너지고 있다. (박인걸·목사 시인) + 라일락 그물 우리 함께 무심히 봄볕을 따라 걷다가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라일락꽃 그물에 덜컥 걸려들고 말았지 다 제쳐놓고 지체하면서 입에 물기도 하고 행복에 겨워 파묻히기도 하다가 정원 가득 라일락을 심어 늘 취해보자 약속도 했었지 헤아릴 수 없고 헤아리기도 버거운 젊은 날의 소망이라기엔 너무도 진한 향기 다발이었지 허나 나는 아직 그 그물 속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너는 그 향기를 뿌리치고 너울너울 속절없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지 세상 곳곳을 물들이고 발길을 잡아끄는 라일락에 왜 우린 그냥 순일하게 한평생 어우러질 수 없었을까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