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깊숙한 영혼의 밑바닥에 보이지 않는
언어의 절에까지 꿰뚫고 들어가야
비로소 만날 빛샘물 고요, 무궁의 고요,
고요는 이제 시의 핵심에서나 찾을 수 있다.
(박희진·시인, 1931-)
+ 고요
내장산(內藏山) 깊은 골 원적암(圓寂庵) 뜰에
붉은 감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저놈 익기 기다리며 침만 삼키다
산까치 한 마리 졸고 있어요
(임보·시인)
+ 고요한 시간
전화벨의 진동 소리에
땅의 한 부분이
약간 흔들리다.
한 떼의 새들이 날아오르고
바람은 고요해졌다.
숲의 미동(微動)조차
감지되는 오후(午後).
전화벨의 진동 소리에
하늘의 한 부분이
서서히 흔들리다.
(양수창·시인, 1953-)
+ 이 고요한 우물
허공에 꽃으로 안기거나
바람으로 울며 다니거나
내 돌아가 마지막 들여다볼 곳은
고요한 우물뿐입니다.
이승을 구름으로 흐르고
삼십삼천 하늘을 학으로 날아도
돌아가 마지막 들여다볼 곳은
고요한 우물뿐입니다.
불꽃같이 타오르는 나의 일생
누더기 벗으며 닦고 닦아서
해로 뜨고 달로 뜨고
부서져 몸은 다시 별로 피어나도
변하여 걸어가는 내 모습 하나하나
남김없이 비추어주는 곳
나고 죽고 살아가는 온갖 길이
거울보다 더욱 잘 비치는 나라
누가 나를 몰고
내가 또 나를 몰고 가는 닿는 땅
그 죽음에 이르러 들여다볼 곳도 오직
이 고요한 우물뿐입니다.
죽는 순간의 내 눈빛이 담겨지는 곳
죽는 순간의 내 미소가 비치는 곳
(이성선·시인, 1941-2001)
+ 내 가슴의 고요
너를 바라보는
내 가슴의 고요에서는
낮은 풍금소리가 난다
낙엽은 사철
아름다운 사연의
엽서처럼 지고
그 발자욱마다 기도로 스미리
풍화하는 노래로 잠기리
함께 가는 강물의 유유함이여
함께 가는 햇살의 눈부심이여
너를 생각하는
내 가슴의 고요는
살구꽃잎 흩날리는
4월 훈풍 같다
땅 위에 이런 은혜
다시 없으리
눈물 가득 너를 보는
내 가슴의 고요
(이향아·시인, 1938-)
+ 고요
메밀묵 팔러 시내 가신 엄마, 앞들에 땅거미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섬돌에 앉아 목 빼어 고갯길 바라보노라면
외딴집 외딴 마당은 아득히 고요해
건너 마을 저녁 연기도, 개 짖는 소리도 그치면
빈 묵판 달각이는 엄마 발자욱 소리 들려오도록
세상은 너무나 고요해
집 나간 강아지 검줄이 집도 고요해
빚 대신 팔려간 중송아지 없는 외양간도 고요해
장작불 사위어든 쇠죽솥 고래도 고요해
이태 전 돌아가신 아버지 기침소리도 나지 않는,
학교 간 누나도 돌아오지 않는 두 칸 방도 고요해
달이 먼저 뜰라나, 엄마 먼저 오실라나
토옥---- 톡!
가으내 바싹 마른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
(반칠환·시인, 1964-)
+ 하늘빛 고요 - 피정(避靜) 일기
저는 죽었습니다. 이제
당신 안에서
새로운 신뢰를 얻길 원합니다.
털갈이하는 짐승은 아니지만
갈아입은 새 옷이, 빛나는 현재(現在)이길 원합니다.
해일 휘몰아치는 당신의
바다, 거센 의혹의 물살 견디면서
제 영혼의 진주를 키우렵니다.
고통은 저의 다정한 벗,
반지를 끼듯 삶의 고통과 팔짱끼고
당신과 함께 이 길을 가렵니다.
소지(燒紙)가 타오르듯
사랑은 불타올라야 하는 법. 이미
죽은 저를 위해
비석 따윌 세우지 말게 해 주십시오.
심해(深海)의 물고기처럼 저는 당신에게
눈멀렵니다.
눈멀어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겠습니다.
강진만(灣) 오늘
저 바다에 떠 있는 하늘빛 고요는 바로 접니다.
당신의 크신 은총에 감사할밖에요!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세상의 고요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일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황지우·시인, 1952-)
+ 고요, 격렬한 - 내 발 앞의 배추벌레
꼼짝하지 않고 죽은 체하는
한 마리의 고요를 본다
공기들을 일순 긴장시키며
물질이 된 놈의 태연
한낮의 정적과 바람 햇살을
상처로 덮은 채
놈은 격렬하게 떨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있다면 금이 갔을 것이다)
몸뚱이를 온통 귀로 만든
저 번지는 선들의 소용돌이
무정부주의자처럼 흔드는 섬모들
허나 웬걸
겁먹은 마음 같은 건 놔둔 채
전신으로 빛과 그늘 대기와 어울리는
저 몸,
속타고 있는 불의 싹들
열리는 몇 칸의 창(窓)으로
나뭇잎들의 옷자락이
초록을 헹구러 다가서다!
뒤이어 구름도 몇……
직물처럼 짜여진 고요의 허벅지 슬쩍 당겨
한 줄에 꿴 꿈틀 산맥
앞의 그늘 휙 돌아보며 가로질러 간다
말들은 품은 채
땅을 쥐었다 놓았다
하늘 모았다 흩었다 하면서
내 몸 속 창(窓)엔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도 쑤셔박으면서
(손진은·시인, 1960-)
+ 고요하다는 것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사이에서
서로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보세요.
즐겁게 폐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쩍도 않을 것입니다.
(김기택·시인,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