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의 '손톱을 깎으며' 외 + 손톱을 깎으며 언제 이만큼 자랐나? 나도 모르는 새 굳어버린 나의 자의식 무심한 세월이 얹힌 마른 껍질을 스스로 깎아낸다 조심스럽게 언제 또 이만큼 자랐나? 나도 모르는 새 새로 돋는 나의 자의식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손톱 산다는 게 참 성가신 일이다 깎아버린 지 엊그제인데 어느새 또 자라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야 잘라버리면 그만이지만 내 마음의 후미진 곳에서 자라고 있을 손톱이며 발톱이며 코딱지며 그것들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 살다보면 별 게 다 일이다 (김시천·시인, 1956-) + 손톱 사랑 봉숭아꽃 분홍빛 손톱이 거의 밀려갈 무렵 첫눈이 내려서가 아니라 가장 처음 내 손톱에 깊은 눈길 던져주던 사람 끝까지 기억나누나 (임영봉·시인, 1959-) + 손톱 깎는 이유 - 만재도·11 현실이 너무 길어도 지루하다 그래서 나는 손톱을 깎는다 (이생진·시인, 1929-) + 손톱 어느새 손톱이 길게 자랐다 가시에 찔렸을 때나 쳐다보는 것 그때에도 손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점이 아파서 그랬다 그토록 무시당하면서도 이제껏 붙어 있는 손톱 꾹꾹 참는 것을 보면 내 인생을 대변하는 것도 같은데 내가 너무하나 싶어 눈물이 핑 돈다 (이생진·시인, 1929-) + 손톱 왠지 심란한 날은 손톱을 깎는다. 우리 살아가는 애처로운 일상이 때때로 잘려나가듯 달아나는 손톱을 본다. 어렵고 어려워라 일마다 이리도 어려울까 순리(順理)도 원칙(原則)도 한순간에 밀려나고 분김에 손톱을 뜯어도 역(逆)으로만 가는 세상. 등뒤에 그늘을 숨기고 덤덤히 서 있을 때 어찌 견디나 손톱이나 깎지. 톡톡톡 잘려나가고 무심찮게 자라도록…… (강세화·시인, 1951-) + 손톱을 염(殮)한다 손톱을 자른다 나의 피와 살 속에 박혀 함께 뒹군 삶 이제 용도 폐기되어 버림받는다 옛사람들은 임종하면 잘라 두었다가 삼 년 후에나 꺼내 곡성으로 떠받들어 보냈다는데 나 또한 잘라내긴 해도 일말의 아픔 남아 있어 하얀 휴지에 곱게 염하여 쓰레기 속으로 하관하며 명복을 빈다 후세엘랑 부디 좋은 세상 만나거라. (최금녀·시인, 1941-) + 손톱 한번쯤은 할켜서 앙칼진 여자의 성깔머리 보여 주고 싶었다. 가라 가라 몸 안에서 떠밀려 드디어 손끝에 다다라 세상 앞에 드러난 세상을 향한 나의 저항 그러나 체질적으로 저항은 조금만 길어도 불편해 가위를 들여대 잘라 버린다. 그것도 잘 다듬으면 날카로운 펜촉으로 도약 몸 안에 오래 고인 진한 울화 배어나 이 세상 어느 벽보판에 붉은 글씨 하나 남길 수 있거나 중심 없이 흔들리는 세상을 겨냥한 화살촉으로 키워도 좋으련만 시원하게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묵묵히 고요히 목이 잘린다. 콕 찍어 피 한 번 내지 못하고 으윽하고 소리 한 번 치지 못한 채 유순한 침묵으로 굳어 잘리고 마는 그러나 미지의 세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여자의 숨은 반란. (신달자·시인, 1943-) + 손톱 손톱을 깎는다. 하얗게 낮달을 띄워놓고 내 몸에서 자라난 손톱을 자른다 손끝에서 잘려나간 손톱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 붉은 백일홍을 배경으로 그대는 하이얗게 웃고 있다만 하늘에는 양떼구름이 흐르고 눈부신 햇살이 빛나고 있다만 그대를 안았던 뜨락 위로 백일홍을 닮은 노을이 피어나고 여름이 끝난 저편에 서 있는 낯선 그대여 화르륵 화르륵 백일홍 지는 소리를 들으며 웃고 있는 그대를 잘라낸다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파알랑 파알랑… 발그스름한 그대 미소가 떨어진다 손톱 밑 살점이 잘려나가고 붉은 꽃 한 송이 피어난다 열 손가락 가득 꽃잎이 날린다. (고현숙·시인, 1954-) + 손톱을 깎다 달포쯤인가 자란 손톱을 깎아 소중한 물건인 양 요리조리 살펴보고 종이에 싼다 빨간 매니큐어로 가련하게 꾸며진 손톱이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엄지손톱이다 강 맞은편 누런 황소 옆으로 꽃상여가 떠간다 머뭇거리는 촉촉한 가슴이 눈뜨고 운다 머언 먼 저승 길 함께 살아가는 아픔이 피어오른다 불쑥 찾아오는 죽음들이다 촛불이 켜져 있고 바람이 불어온다 불꽃이 흔들리고 촛불이 꺼지려 한다 시린 손가락에서 깎아낸 손톱 하나 놓고 요령소리 앞세워 이승의 살붙이 떠나갔다 (황인술·문학평론가 시인) +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잠든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창 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본다 별들도 젖어서 눈송이로 내리고 아기의 손등 위로 내 입술을 포개어 나는 깎여져나간 아기의 눈송이같이 아름다운 손톱이 된다 아가야 창 밖에 함박눈 내리는 날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린다 흘러간 일에는 마음을 묶지 말고 불행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했다 날마다 내 작은 불행으로 남을 괴롭히지는 않아야 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고요한 용기로써 사랑하지 못하는 오늘밤에는 아가야 숨은 저녁해의 긴 그림자를 이끌고 예수가 눈 내리는 미아리고개를 넘어간다 아가야 내 모든 사랑의 마지막 앞에서 너의 자유로운 삶의 손톱을 깎으며 가난한 아버지의 추억을 주지 못하고 아버지가 된 것을 가장 먼저 슬퍼해보지만 나는 지금 너의 맑은 손톱을 사랑으로 깎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정호승·시인, 1950-) + 손톱에 밴 고등어 비린내 - 잊지 마라 내 눈뜬 죽음 나는 죽지 않았어 낚시 바늘에 꿰어 너희들의 밥상에 오르긴 했다만 나는 결코 죽지 않았어 너희들의 눈과 코와 손톱에 악착스레 스며들 거야 스며들어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악취가 될 거야 내 죽음이 장난일 수 없도록 너희들의 뇌리에 단단히 틀어박힐 거야 비린내! 천 번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내 목숨의 비린내! 이게 내 자존심이야! (윤석성·시인, 1948-) + 내 손톱에 봉숭아물 흘러간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땐 봉숭아물을 들여보세요. 돌이킬 수 없는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땐 봉숭아물을 들여 보세요. 있지 못할 흘러간 추억이 몇 개나 있나? 조용히 눈을 감고 떠올려 보세요. 그 중에는 봉숭아물들이던 때가 생각날 겁니다 그럴 땐 여름마다 봉숭아를 한 포기 심어서 봉숭아물을 들이세요. 만약에 동지섣달 긴긴 밤에 잠들지 않고 그 옛날 어린 시절이 그토록 새록새록 떠오를 때면 냉동에 찧어 얼려 놓은 봉숭아를 꺼내서 손톱에 올려놓고 기다려 보세요. 세 번만 갈아붙이면 아주 예쁘게 물듭니다. 이렇게 한 다음 열흘 후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발라보세요. 어린 시절이 돌이킬 수 없는 먼 추억이 아닙니다. 세월은 거슬러 현실로 되돌아왔습니다. 너무도 흐뭇하고 행복합니다. 그 옛날 친구들이 눈앞에 와 히히덕 거립니다. 내 생의 허전한 한 칸의 공백을 봉숭아가 꽉 채웠습니다. 일 못한다 꾸짖던 왼손도 봉숭아물 덕분에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이월순·시인, 193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