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는 행복추구권이라는 인간 본연의 권리에 기인한다. 근대시민혁명과 함께 개인의 권익신장을 반영한 것이 바로 개인주의였다. 그 후에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성 상실이 사회에 팽배한 것은 개인주의를 넘어선 인간의 이기주의때문이였다. 이기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추구 경쟁 속에서 생겨났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며 달라지는 것이 바로 \"이기적\"이다라는 말의 뜻이다. 위의 글은 모든 '만족 추구'를 \"이기적\"인 것으로 포함하였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모두 '이익 추구'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익 추구는 곧 만족 추구로 이어지고, 그것이 \"이기적\"이라는 공통된 말 아래 놓이게 된다. 차이점은 이익 추구를 위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디까지 행하느냐에 나타난다. 개인주의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집단보단 개인의 실재를 우선시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집단의 이익은 뒤로 물러서야한다는 것이 개인주의다. 이기주의 역시 개인적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와 다른점은 그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타개인의 이익에 위해를 가함을 서슴치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자연본성의 이기심에서의 개인주의와 인간의 이타심을 배제한 이기주의는 모두 한계가 있다.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는 가족, 국가등의 집단과의 관계된 책임회피를 한다. 이타심을 배제한 이기주의는 종국엔 이익배반을 낳는다.
형법에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라는 것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가던 배가 난파당했다. 두 사람이 하나의 판자에 메달렸는데, 그 판자는 한 사람의 목숨만을 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판자에 메달릴 경우, 두 사람 모두 죽는 것이다. 이때, 한 사람이 자신이 살기위해 다른 한 사람을 밀어 바다에 빠뜨린다. 물론 그 다른 한사람은 죽는다.
살아남은 사람은 무죄인가, 유죄인가.
무죄다.
'인간이 이기적이다'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면, 바로 이럴 경우에 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경우에 누가 자신이 바다에 빠지고 다른 사람을 구하겠는가? 그 어느 누구라도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카르네아데스의 판자의 경우는 생명의 절대가치의 충돌이다.
우리는 또다른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를 가지고 있다. 그 판자 위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들은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명예와 같은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 판자에는 두 사람이 메달려 있을 수도 있고, 두 사람이상의 다수가 메달려 있을 수도 있다. 변치않는 문제는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의 충돌은 인간을 \"이기적\"이게 한다.
\"이기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라는 논쟁은 불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 어떤 의미를 적절하게 적용하는가이다.
같은 칼일지라도 도둑의 손에 들어가면 범죄도구로 쓰이지만, 무사의 손에 들어가면 명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