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야.. 여기가 오빠가 항상 말하던.. 그 호수야...
오빠가.. 기쁠때나 슬플때나.. 무언가 고민이 있을때면..
언제나 찾아왔던 호수...
어쩌면 오빠가..
서울로 이사가고 나서 즐겨찾던 한강보다는..
이 호수가 오빠한테는..
더욱 아련하고..
더욱 포근하고..
너두 알잖니.. 그런느낌..
고향에 왔다는 느낌이랄까... 오빤 여기서 고향을 느껴..
그리고 이 고향에.. 오빠의 마음의 고향에..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성미와 함께..
단 둘이서 배를 타고 오붓하게 나올수 있다는 사실이..
오빠는 너무.. 기뻐...'
지는 해를 머금어 붉게 물든 호수 사이로, 나와 그녀를 태운 배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가로질러간다.....
'성미야..
오빠는 말이지.. 저 지는 붉은 해를 보고 있으면 말이지..
예전 아버지 돌아가셨을때 생각이 나..
그때 아버지 돌아가셨을때..
혼자 이곳 강에 배타고 나와서...
배 위에서 하루 종일 소리내서 엉엉 울었었거든..
정말로..그 때는 정말로..
세상이 다 끝난것만 같았어.. 그리고 그 후로 계속 우울하게 세상을 살았구...
삶 자체가 힘들었으니까.. 성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지...'
배는 천천히 앞으로 나오다가.. 드디어 호수의 중간 정도에서 멈춰섰다.
정적.. 주위의 모든것이 멈춰있고.. 숨 소리도 나지 않고..
오직 저물어 가는 태양과..
그 해를 머금은 호수의 물만이 우리를 태운 배 주위를 붉게 둘러싸고 있었다.
'근데 성미야..성미야.. 오빠는 성미를 만나서 말이지...
성미를 만나서.. 진짜로 세상 사는게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이란게 무엇이고..
행복이라는게 무엇인지 깨달았어...
성미를 만난 날부터.. 결혼식날.. 성미와 헤어지던 날까지 말이야...
오빤 진짜.. 그때는 이 세상이 전부 오빠것인것만 같았어...'
난 호수를 바라보던 눈길을 그녀에게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한다....
'근데 성미야 그거 아니..? 이건 오빠한테는 정말 비밀이야긴데 말이야..
오빠.. 오빠 아버지 돌아가시던날.. 바로 이 자리에서 울면서 말이지...
나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구...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 만들어서.. 그렇게 헤어질때 아파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거든....
그런데 .. 성미를 만나서 그 맹세가 깨지기는 했지만 말이야...후훗...'
어..근데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눈 앞이 갑자기 흐려지는거야.. 내가 왜.. 내가 사랑하는 그녀랑 이렇게 함께 있는데 내가 왜.. 난 눈을 소매로 닦으며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 하지만 오빠는 후회하지 않아..
성미.. 정말로 오빠가 이 한 몸을 바쳐서 사랑해도 부족할만큼..
정말 착하구.. 예쁘구.. 아름다운 여자였으니까 말이야...
하하.. 아니라구.?? 아냐..
넌 정말 그래.. 오빠 눈에는 이 세상 어떤 여자보다도 성미가 최고야...
아.. 근데 성미야.. 아까 오전에.. 너 데리러 너희 집에 갔을때..
너희 부모님 표정.... 뭐랄까......'
다시 눈앞이 흐려진다.... 눈을 닦으러 손을 눈쪽으로 옮겼지만..
아무리 닦아도 닦아도.. 눈이 또렷해지지 않는다..
이런.. 성미에게 이렇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데.. 이런...
난 다시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웃는 얼굴로 다시 그녀를 쓰다듬으며 바라보았다.
'성미야........있잖아.......'
'성미야........'
또 다시 눈앞이 흐려진다....
'성미야...근데......'
'성미야..........'
'성미야... 너 왜 이렇게 가벼워졌니... 왜...'
그녀를 담고 있는 하얀상자 위로, 나의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조용히 떨어진다....
'하하.. 성미야..미안해.. 오빠가 또 약한 모습을 보여 버렸네....
진짜 앞으론.. 앞으론 절대 울지 않을꺼라구.. 성미 결혼식날 맹세했었는데 말이야.. 진짜루...'
난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다시 붉게 물든 호수 저편의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아련히 보이는 빨간 불빛.. 저 불빛..
어디선가 본 불빛... 바로 약속의 불빛...
그리고 그 불빛 사이로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 그리고 약속..
' 오빠.. 세상이 우리를 방해하더라도, 우리 사랑 변치 말구..
이렇게 영원히..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영원히... 서로만을 사랑하기로 해요..
알았죠??후훗... 오빠.. 우리 이 촛불에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약속..'
난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미야 근데 있잖아.. 너 설마 ..
너가 약속을 어겼다구.. 오빠한테 미안해 하는건 아니겠지??
미안해 한다구??
이런.. 이런..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넌 약속을 어긴 게 아니야.. 이렇게 오빠 곁에 니가 있구..
네 곁에 오빠가 있는데.. 그게 어떻게 약속을 어긴거야..
오빤 이렇게 영원히..
언제까지나 영원히.. 성미곁에 있을테니까.. 걱정하지마..'
........
'아차..근데 이제 생각났다..
오빠가 전에 들은 말이 있는데 이승에서의 1일이..
저승에서는 1년과도 같데...
그래서 하루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
다음 생에서는.. 1년 먼저 태어난다구 하더라구.......'
.......
'오빠...
다음에 .. 다음생에서.. 오빠 다시 만나면...
연하라구 무시하지 않을꺼지...??
그래봤자 겨우 2년차이니까 말이야....
하하..그때는 내가 너를 누나라고 불러야 되는건가??'
.......
하하.. 그녀도 웃고.. 나도 웃었다..
역시 난 그녀와 함께 있을 때가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가장 즐겁다.....
'성미야.. 근데 오빠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성미를 품에 안고 있어서 너무 편안해서 그런가..
너무 잠이 온다... '
...........
'근데 성미야.. 이 저물어 가는 해를 머금고 있는..
이 호수.. 너무 포근해 보이지 않니... 뭐라구??
너두 지금 그 위에 눕고 싶다구..? 그래.. 그럼 우리 이제 그만 이야기 하구..
호수에 누워 잠을 청하도록 하자...'
........
약속.. 이 세상에선 지켜지지 못한 약속.
하지만 약속.. 다음 세상에선... 다음 세상에선 꼭 지켜질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