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오빠라고.. 설마 그녀가.. 설마 그녀가.. 난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뒤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꿈이었을뿐... 그녀가 아닌 민정이가 내 뒤쪽에서 나를 부르며 결혼식장쪽에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민정이는 헥헥 거리면서 뛰어오더니, 내 앞에 다다라서 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을 꺼낸다.
'오빠~~!! 한참 찾았잖아요.. 어제 성미랑 결혼식 끝까지 보고 가시겠다고 약속하셔놓곤....
이렇게 그냥 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오빠도 ..참.. '
그녀는 나에게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을 하더니만,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뭔가를 꺼내 나에게 건낸다. 흰 종이에 둘둘 말려있는 조그만것.... 만져보니 반지였다.
그래..아참.. 어제 그녀에게 반지를 안 받았었군.. 이제 우리 사이가 정리되었으니..
반지도 필요없겠지.. 난 민정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후, 다시 뒤로 돌아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민정이를 뒤로하고 택시에 올랐다.
..........
'아저씨.. 한강이요...'
.............
내가 이 곳을 언제 와보고 지금 다시 와보는 건가..
난 항상 내가 앉았던 자리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차가운 겨울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 전에 그랑 같이 이곳에 와 보았던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군.
그러고 보니.. 그..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딴 세상으로 떠났을까..
아마 살고 있다고 해도 허리나 머리가 상해서 불구자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런 그의 희생.. 이젠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저 세상에서라도 그를 만날까..
난 언제나처럼, 한강변 둑 있는 곳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그래.. 이제 내게 남은건 하나도 없다...
그냥 이대로.. 이대로 한강물에 내 몸을 담궈.. 내 모든 희로애락을 물에 씻어내 버리자. 난 웃옷을 벗어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구두를 벗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언젠가 본 것 같던.. 그 빛.. 그 빛이 또다시 내 눈을 스쳐 지나간다.
난 다시 왼손을 바라보았다. 반지였다.. 그래..반지.. 난 언젠가 처럼 반지를 빼서 다시 왼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태양빛에 비추어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반짝이는 빛 사이로..
그녀와 내가 지냈던 아름다운 순간, 아쉬웠던 순간들이 하나 둘 슬라이드 필름 스치듯 오버랩 되며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이 영상의 끝은 항상.. 언제나 처럼.. 그 약속..
' 오빠.. 세상이 우리를 방해하더라도, 우리 사랑 변치 말구.. 이렇게 영원히..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영원히... 서로만을 사랑하기로 해요.. 알았죠??
후훗... 오빠.. 우리 이 촛불에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약속..'
햇빛이 반지의 한쪽 끝 부분에 반사되어, 마치 촛불인양 고요히 빛을 내며 타오른다..
그래 약속.. 그런데 그 영원히 사랑하자던 약속..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마는구나..
난 주머니를 뒤적여서, 아까 민정이가 내게 건내준 반지싼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종이를 끌러, 나머지 반지.. 그녀의 반지를 내 반지 위에 가볍게 포개 올렸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 비록 우리 사랑은 이렇게 끝나지만..
오빤 이 반지 두 개를 오빠품에 영원히 간직한 채.. 이 세상을 이만 떠나갈게.. '
난 반지를 다시 종이에 싸서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옆에 놓여져 있던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다시 한번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
햇빛에 반사된 구겨진 종이사이로, 가는 검정색 선들이 희미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종이를 바닥에 놓고 손으로 밀어서 편 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었다.
편지였다.. 글씨 여러곳이 물에 젖어 번져있는 편지....
난 떨리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
' 영원한 나의 사랑 오빠에게
오빠..
사랑하는 나의 오빠..
오빠가 이 편지를 보실 수 있다는건 아마도 제가 오늘 ..
눈물을 참고..
오빠를 바라보며 웃었기 때문일거예요..
오빠..
이렇게 제가 오빠를 떠나는거..
제 본심이 아니란거 아시겠죠..
시험이 끝나고..
오빠가 떨어진걸 엄마가 알게되자, 엄마는 바로 결혼을 하라고 저를 독촉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삼촌.. 삼촌이 실의에 빠져있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제가 이민혁이라는 사람과 올해 안으로 결혼하지 않으면..
......오빠를 이번에는 진짜로 죽여버리겠다고..........
그리고 이말을 오빠에게 하면 그때는 오빠를 바로 파묻어 버리겠다고.....
......저에게 나지막히 말했어요....
전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단지 오빠가 죽는 것을 막기위해......
엄마에게 결혼식 날짜를 독촉하고....
....그리고 이민혁이라는 사람에게 온갖 애교를 다 떨어가면서.....
다행히 올해가 지나기 전에 결혼식 날짜를 잡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구요.....
오빠...
앞으로는..
..........앞으로는 제가 오빠 곁에 머무를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원치않는 결혼생활 속에서...
많은슬픔을 겪겠지만...
단지...
단지...... 오빠가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으며...
성미는...
그렇게... 그렇게......
오빠를 그리워 하며 남은 여생을 마무리 하려 합니다...
물론..지금부터..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자신이 안 서지만요...
....오빠...
사랑하는 우리 오빠..
비록 우리..
이 세상에서는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만..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서..
그때는 꼭 사랑을 이루기를 바래요..
...오빠..
사랑하는 우리오빠..
저 없다구 슬퍼하거나 실의에 빠져있지 마시구...
꼭 열심히 사셔야 해요.........
오빠...
.....이젠 안녕...
그리고 오빠....사랑해요...영원히.....
-F.L. 성미'-
그녀가 쓴 편지지 위에.. 툭..툭.. 소리를 내며 내 눈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난.. 난....도대체 난... 난 왼손에 들고 있던 반지를 움켜 쥐며 가슴깊은 곳으로부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