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나의 생각대로, 전화를 걸었던 건 그녀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처음 우리가 차를 몰고 건달들에게 부딪쳐 왔을때부터, 집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를 통해서 바깥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녀가 아무리 애원해도 날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으셨는지 그냥 말 없이 모니터만 바라보고 계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내가 그녀 삼촌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며 그에게 덤빌려는 자세를 보이자, 그때서야 뭔가를 결심하신 듯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삼촌에게 전화를 해서 그냥 돌아가라고 말을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마지막에 보여준 내 용기를 높이 평가하셨나..
하여튼 그 덕분에 나는 그녀 아버지로부터 2년간의 기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 했던데로, 그녀의 아버지는 내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고시촌이 밀집해 있는 신림동 부근에 아파트도 한채 장만해 주시고, 학원비 대고 한달 생활하고도 남을만한 충분한 돈을 생활비로 매달 보내주셨다.
난 그런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의 관계는, 예전과는 다르게 상당한 구속을 받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내가 보장받은 2년은 돌려 생각하면 그녀 집안과 민혁이라는 놈의 집안과의 결혼 유예기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녀 어머니는 남편의 말에 따라 어쩔수 없이 2년간 결혼을 늦추기는 했지만, 내가 실패하기만 하면 바로 민혁이라는 놈과 그녀를 결혼시킬 심산이었다.
그래서 난 그녀를 매일 만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혼전에 몸을 잘 간수해야 된다는 그녀 어머님의 억지로 그녀 어머니의 감시하에서 잠깐동안 손도 못 잡아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비록 헤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말 그대로 또다른 의미의 헤어짐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사법고시.. 일류대 생들도 몇 년간 공부해도 겨우 붙을 둥 말둥 한다는 사법고시..
그런 사법고시를 겨우 작년 일년 공부한 내가 내년과 내후년까지 해서 2차까지 합격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책상앞에 놓여진 그녀의 사진과, 매일 저녁 학원을 끝마치고 와서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면 녹음되어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등에 업고, 하루에 4시간 정도씩만 잠을 자면서 피나는 노력을 다해서 공부를 했다.
97년 2월, 그녀의 응원을 들으며 난 처음으로 사법고시 1차 시험을 치러 갔다.
내가 제대로 공부를 시작한지 불과 3개월도 채 안되는 시점에서 본 시험, 붙을 리가 없었다. 난 그 시험을 그냥 시험장 분위기를 익힌다는 의미에서 응시했었고, 그녀의 아버님도 그리 기대를 하시지는 않으시는 것 같았다.
4월달에 발표된 결과는 역시 불합격 이었다.
이제 남은건 98년 1차 시험 한번..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2년을 채울것도 없이 그대로 끝나는 것이었다. 난 발표가 난 직후부터, 하루 4시간 자던잠도 3시간으로 줄이고, 밥 먹으면서도 법전을 펴 놓고 보면서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나를 보러온 그녀는 옆에 앉아있는 그녀 어머니 때문에 나에게 안기지는 못했지만, 말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면서 야위어 가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나는 더 미칠지경이었지만, 난 이렇게 안하면 그녀를 영영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오직 법전만을 바라보며 일년을 보냈다.
그리고 98년 2월, 두 번째로 1차 시험을 보러 시험장으로 갔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때문일까,
난 긴장도 하지 않고 차분하게 시험에 임했다. 그리고 4월달에 발표된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것도 높은 점수로.. 그녀와 나는 기쁨의 함성을 울렸고, 그녀 아버지도 꽤 만족해 하는 눈치셨다.
그녀 어머 니만 빼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 이런 기쁨의 여세를 몰아 2차 준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마 책을 미친듯이 바라보다가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정신을 잃으며 잠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난 이제 올해 2차만 붙으면 그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말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해 .. 그러니까 작년 6월, 아침에 그녀가 직접와서 해 준 밥을 먹고 힘을 내서 2차 시험을 보러 갔다.
시험 기간은 모두 3일, 난 3일내내 내가 아는 문제는 모두 맞힌다는 심정으로 차분히.. 차분히 답안지를 채워 나갔다.
그렇게 3일이 지났고, 난 시험을 끝냈다. 이젠 결과가 제발 좋게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장속에서 7,8,9,10 4개월이 흘러갔고, 11월 초가 되어서야 드디어 합격자 발표를 했다.
그녀와 나는 아침 일찍부터 합격자 확인 전화번호를 누르며, 초조한 마음으로 빨리 합격자명단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아마 6시간 정도를 전화를 눌러댔을까..
드디어 합격자 발표 데이터 베이스에 전화가 연결이 되었고.. 난 손을 벌벌 떨면서 조심스럽게 내 수험번호를 눌렀다..
아마 살아가면서 가장 긴장되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잠시 후, 수화기에선 내 시험 결과가 흘러나왔고, 그걸 들은 그녀와 난 서로를 얼싸안고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아.. 그럼 총각이 2차에 합격했고, 그렇게 해서 3차까지 합격해서 지금 그 성미라는 아가씨랑 결혼하러 결혼식 장으로 가는건가???...정말 멋지구만~~~이야~~ 정말 멋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