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시 모음> 이생진의 '담배와 시' 외 + 담배와 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잔인한 독재자의 뒤를 따라가는 일보다 젊은 친구의 담배연기를 따라가는 일 50m 전방에 담배 피는 사람이 보이면 슬그머니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러다가 문득 '저 사람도 시를 보면 피해 갈까' 하고는 미안해진다 저 사람이 싫어하는 짓을 나도 하면서 왜 저 사람만 밉다 하는가 그 사람은 담배연기로 시를 쓰는데 하고 내 시를 나무란다 (이생진·시인, 1929-) + 담배를 피우며 담배를 피우면 내 키가 처마에 닿는다 가을 나무 손가락에 구름이 걸린다 부질없이 낙엽을 태우지 말 일 우리 모두 불타면 하늘인 것을 (민용태·시인, 1943-) + 금연하는 이유 흡연은 인생의 낭비입니다 흡연으로 인해 폐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뚫린 구멍으로 세는 것들이 무서운 겁니다 사랑이 세 버리고 명예가 세고 돈이 세고 제 몸의 피와 살이 세고 생명이 세고 결국 혼이 빠져나가 가정이 깨지고 국가가 빈곤해집니다 흡연, 한 인생의 낭비이기 전에 지구의 멸망입니다. (이영균·시인, 1954-) + 담배·3 곰방대와 찰떡궁합이 되어 할아버지가 몽롱하게 당했고 아버지도 똑같이 당했건만 나까지 넘어갈 줄이야 예저기 사랑의 흔적 남겨놓아 애먼 마누라까지 바가지 긁게 싸잡아 이간질하는 이 가문의 철천지원수 아들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씨도둑은 못하는 법이라서 미끈한 몸매로 까딱하면 너까지 넘보려 들 테니까, 내가 당해봐서 안다 한번 정을 주면 찰거머리 되어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권오범·시인) + 담배 중학교 때부터 피웠던 담배 그 때문에 학생부 선생님한테 참 많이도 맞았고 나름대로 끊으려도 노력도 했었지 그런데도 이틀을 못 넘겼어 그러다 널 만났지 그리구 니가 그랬지 자기를 싫어하는 만큼만 피우라고 그 뒤론 입에도 안 댔었는데 지금은 니가 없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울 수가 있는데 어쩌다 한 개피 물어도 이내 꺾어 버려 아직은 널 사랑하나 봐. (서천우·시인) + 담배 너와 처음 만났을 때 숨이 가빠와 난 숨을 쉴 수 없었다 만날수록 편안함 그 속에서 난 행복을 느꼈다 술을 마시거나 글을 쓰거나 하면 너 없이는 외로워 손부터 떨렸지 너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주었으나 너와의 숨은 사랑이 너무 고되어 이제 너와의 관계를 끊고 싶다 너와 아주 인연을 끊으려 하니 외상값부터 갚으라는 독촉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머리를 쥐어뜯는다 출근길 네 동생이 내 수레를 막고 계속 살라 행패 부리는 것도 싫끗하다* 이제 우리의 사랑, 우리의 인연 여기서 끝내면 안 될까 나를 이제 여기서 놓아주면 안 될까 더 이상 내 머리를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될까 몸이 반쪽이 된 나를 애처로이 보아주면 안 될까 내가 반듯이 서지 못하면 네가 아무리 빛나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최범영·시인, 1958-) *싫끗하다: '몸서리쳐지다'의 충청도 방언 + 사랑도 담배처럼 담배는 경고 문고가 있습니다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꼭 건강을 해치는 것만은 아닐 텐데요 사랑도 담배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경고 문고가 분명히 있는 것만 같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랑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사랑을 한다고 해서 꼭 마음이 아픈 것만은 아닐 텐데요 (김병훈·시인) + 공중화장실에서의 문득 깨달음 담배 연기로 오리무중인 버스터미널 공중화장실에서 어떤 놈들이 뱉어낸 매캐한 담배 연기를 마시면서 미지의 폐들 속에 들어갔다 나온 매연을 들이키면서 내 허파를 씻은 공기들이 또 누구의 허파 속에서 좌충우돌 구석구석 요동을 치다 나올까를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한 물에 노는 물고기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공기가 사람과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들 모든 생명들을 묶고 있는 단단한 끈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한 담배 연기의 버스터미널 공중화장실 (임보·시인, 1940-) + 난 담배 안 끊어! 예로부터 한국사람 배고픈 놈 밥 한 숟가락은 안 나눠줘도 담배인심 술인심 하나만은 후했는데 담배값을 오천원까지 올려 받겠다네? 이제 앞으로는 담배 한 개비 달란 말 함부로 할 수 없겠다 여봐, 힘든데 담배 한 대 꼬실르고 허소 하면서 담배 권할 일 없겠어 국민건강을 염려해서 금연을 권장하는 그 가상하고 기특한 속을 몰라서가 아니라 담배값을 그렇게 올려서 맘먹은 대로 한국성인의 흡연율 60.5%를 30%선까지 낮췄다고 쳐 그럼, 담배장사는 굶어죽나? 한국담배인삼공사 말고 저 말보로, 마일드쎄븐 말이지 저들이 가만있겠느냐고 저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당장에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하고 슈퍼 301존가 뭔가 들이대며 통상보복하겠다고 나댈 게 분명한데 그 다음 사단을 누가 책임질라고 그 뿐이겠어? 까딱 잘못했다가는 이라크쪼 나지 안 그런단 보장 있어? 없는 일도 만들어서 어거지쓰고 말로 할 일에도 다짜고짜 팔잡아 비틀고 다리걷어 넘어뜨리고 하는 거 안 봐? 그렇게 되기 싫으면 차라리 여태 하던 것처럼 외국산 담배의 국내시장 점유율을 더 왕창 끌어 올려줘서 저들 기분 헤낙낙하게 해주는 게 백배 낫지 언제 우리 건강 걱정해 달랬나 괜한 일로 또 열불나게 하고 있어 이 땅에 살아오면서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고 살 수 있는 세상 하루라도 있었어? 이 썩어 문드러져 구역질나는 세상을 그도 없이 어찌 살아? 난 담배 안 끊어 못.끊.어! (서재남·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