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 시 모음> 기진호의 '들판이 아름다운 이유' 외 + 들판이 아름다운 이유 들판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은 아무데서나 살지만 아무렇게나 살지 않는 들풀이 있기 때문이다 쑥은 정하신 때에 쑥잎을 내고 씀바귀는 뜻에 따라 쓰디쓴 씀바귀 잎을 내고 냉이는 명령대로 냉이꽃을 피워 낸다 작은 꽃일 망정 정성껏 피우고서 있는 힘을 다하여 향기를 발하며 산다 우리는 이름 모를 들풀을 싸잡아 잡초라고 부르지만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벌과 나비들이 외면할지라도 서러워하지 않고 그냥 더불어 있음을 감사하며 장미나 백합의 자리를 시기하지 않고 들풀은 들풀대로 아무데서나 들풀로 살아간다 (기진호·교사 시인) + 들길 누가 앉으라는 것일까 들이 풀잎 방석을 내놓는다. 누가 앉으라는 것일까 들길이 꽃의자를 내놓는다. 바람과 나비와 벌들이 다녀간 후 하늘이 가만히 앉아 본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남녘들 들에 사는 것들은 거꾸로 부르면 한결같이 복수가 된다 들꽃은 꽃들이 되고 들풀은 풀들이 되고 들새는 새들이 된다 또 들은 힘주어 발음하면 뜰로 바뀐다 아스라한 들녘이 장독대 수련대는 뒤안의 뜰로 조금만 친하게 부르면 어느새 줄달음쳐 다가와 주는 것이다 (김규성·시인, 1950-) + 들길에 서서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신석정·시인, 1907-1974) + 들길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 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이형기·시인, 1933-2005) + 다시 들판에 서서·2 걷이 끝난 들판에 누군가 서서 눈물 뿌리지 않는다면 새 봄에 돋는 싹이 어찌 사랑일 수 있으랴 수수깡 빈 대궁인 채 바람에 날리며 잿빛 산등성이 등지고 기인 그림자 끄는 네 몸뚱이, 죽어 또 죽어 땅에 몸 눕히면 구름만 덮일 뿐 모두 다 떠나가는데 계절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서서 함께 비 젖지 않는다면 어찌 썩어 다시 생명일 수 있으랴 (박형진·농부 시인, 1958-) + 겨울 들판을 거닐며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허형만·시인, 194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