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시 모음> 임보의 '돌의 나이' 외 + 돌의 나이 어느 고고학 박사가 땅 속에서 석기를 하나 찾아냈다 몇 만 년 전 것이라고 했다 길을 가다 나도 돌멩이 하나 집어들었다 몇 백만 년 전 것이 아닌가? (임보·시인, 1940-) + 생각하는 사람 나도 다음 세대엔 돌로 태어나렵니다. 한 번 앉으면 한 생각으로 몇 백년을 넘나드는 그런 돌로 태어나렵니다. 생각하는 사람 조각 앞에서 생각 안 하는 사람들이 돌처럼 서서 구경합니다. (송호일·시인) + 돌 돌은 침묵의 덩어리 발효된 고요 돌 속으로 영성의 길 비친다 돌의 몸으로 지상에 와서 푸른 밤 창호지 같은 생각 파가다가 어디서 사라졌을까 그 푸른 눈 어디서 얼음장 깨지는 소리로 듣는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밤 새파랗게 깨어있는 돌 (이관묵·시인, 1947-) + 돌 연못가에 돌 하나를 갖다 놓았다 다 썩은 짚가리 같이 어둡기도 하고 퇴적되어 생긴 오묘한 결과 틈이 꼭 하느님이 자시다 만 시루떡 같은 충주댐 수몰지역에서 나왔다는 돌, 어느 농가 두엄더미에 무심히 서 있다가 몇 십 년만에 수석쟁이의 눈에 띄어 수석가게 뜰에서 설한풍 견디던 돌, 이끼와 바위솔이 재재재재 자라고 나무뿌리도 켜켜이 엉켜있다 화산과 지진이 지구를 뒤덮고 난 후 태고의 적막을 가르며 달려온 돌, 비 오면 비에 젖고 눈 오면 눈을 맞는 저 아무렇지도 않은 껌껌한 돌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일은 쏠쏠하기만 한데 물을 주면 금세 파랗게 살아나는 이끼! 검버섯 많은 내 몸에도 무심결에 파란 이끼나 돋아나면 좋겠다 (오탁번·시인, 1943-) + 돌 돌이 되고 싶다 잘난 구석 하나 없어도, 세월의 강물에 모난 곳 닦고 둥글둥글 묵묵히 제자리 지키는 수많은 돌 중의 하나이고 싶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 그곳에서 지나가는 가을바람 동무 삼아 놀다가 땅위로 기는 것들 쉬어 가는 그늘도 되고 아침마다 이슬에 몸을 씻어 하늘거울에 내 몸 비춰보고 싶다 때론 지나가는 발길에 채여도 그대 기다리는 마음으로 내 몸 속 길을 내면 어느 날 그대 피곤한 발걸음 내게 얹으며 지친 삶 내려놓고 쉬었다 가게 그대, 나를 밟고 한 세상 건너가시게 (영강) + 수석 줍기 단양(丹陽) 이름 모를 냇가에서 당신을 닮은 얼굴을 찾습니다. 돌 더미마다 당신은 거기 있을 거라고 돌멩이 하나하나 헤집으며 당신은 꼭 숨어 있을 거라고 물떼새 날갯짓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광화문 네거리 수많은 사람 중에서 당신을 찾기보다야 이곳이 백 배 낫겠지만 우리는 줍고 버리고 버리고 줍고 종일을 헤매어도 당신은 물떼새 날개 속에 숨어 있어 빈 물소리만 손에 담고 돌아옵니다. (전영관·시인, 충남 청양 출생) + 돌에 대한 기원 어느 병원에 가면 뱃속에서 꺼낸 돌들을 잘 보관해 두었다. 담낭 결석이나 신장결석, 요로결석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져 가는 돌들이 모래알 같이 작은 것에서부터 주먹만한 큰 것까지 여러 모양이다. 대흥사 절 집을 찾아가는 길, 일주문 근처에 누군가 수없이 쌓아 놓은 돌들을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구나. 평생을 앓아온 제 가슴 깊은 곳의 돌들을 꺼내어 저리 쌓아 두었구나. 나는 발 밑 구르는 작은 돌멩이 하나 주어 그 위에 놓고 비로소 마음은 세상밖에 둔다. 석장승 앞에 합장을 하듯 바람 한 자락이 그런 나를 머뭇거리다 간다. (김영천·시인, 1948-) + 수석(壽石) 마당 귀에 버려진 작은 돌 햇살 가득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그 속에 지장보살이 보인다 밤마다 들리던 뜻 모를 독경소리 수천 년 씻기어 표정도 지워진 돌 그윽이 번져 나오는 미소 육도(六道)의 중생을 향한 법고(法鼓) 소리 들리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낯선 그림자들 삽사리 짖는 소리에 잠 못 이루던 밤도 줄 서 있던 업인(業因) 때문이었구나 (유창섭·시인, 1944-) + 돌 모름지기 시인이란 연민할 것을 연민할 줄 알아야 한다 과장된 엄살과 비명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덮고 새벽 세 시 어둠이 소복이 쌓인 적막의 거리 걷는다 잠 달아난 눈 침침하다 산다는 일의 수고를 접고 살(肉) 밖으로 아우성치던 피의 욕망을 재우고 지금은 다만, 순한 짐승으로 돌아가 고른 숨소리가 평화로운 내 정다운 이웃들이여, 누구나 저마다의 간절한 사연 없이 함부로 죄를 살았겠는가 머리에 이슬 내리도록 노니다가 발부리에 걸리는 돌 하나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이재무·시인, 1958-) + 돌멩이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 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대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김남주·시인, 1946-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