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사는가...라는 문장에 대하여, 사실 끝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로 보인다. 그럴 리는 없겠으나, 어찌어찌 해서 만약에 그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인데, 나라는 하나의 사람은 아주 특이한 존재이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주체라는 이유로, 각 개인이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서로 틀릴 수밖에 없다. 어느 사람에게는 그 일이 합당하더라도, 본인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왜'가 위험한 것은, 사실 삶을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조금 만져보려는 욕심이 앞서 있는 말이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말하자면 도저히 답이 없는, 그리하여 때로는 거의 모두가 답인... 그런 것을 찾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답을 구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질문은, 오는 인생은 일일여삼추인데 가는 세월이 허송세월이므로 해서 그 실질적이고 확정적 의미는 필경 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굳이 그 의식 흐름의 과정을 보자면, 그것은 각 개인이 각자의 삶에 대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추출될 수 있는 그런 총체적인 모습으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일개의 중도의 과정에 놓인 조그만 국지적 느낌에 그 답이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쩌면 그 길의 끝에서도 자신이 왜 살았는가를 결론지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그 끝에서 왜 살았는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방금 죽어야할 자가 왜 살았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여태 살아왔듯이 내일도 그렇게 살 것처럼, 태연히 내일의 일을 얘기하다가 죽는 것이 인간의 참다운 죽음이며,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죽음이 아닌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굳이 그 방면에 궁금증이 있다면,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논하기 전에, 무엇에 대하여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물어야, 적어도 그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사고와 행동의 방향에 하나의 구조가 있는 틀을 가진,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사는 것이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시들지 않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을 이 세상에 깃발로 세운, 그리고 여기 태어난 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한 사람으로써, 어느 경우에도 자신에게로 향한 책임감 있는 사고와 행위를 하고자 노력하는... 살아있는 자의 기본적 마음의 징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