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이의 중대발표
현준이한테서 연락이 왔다. 현준이는 중대발표가 있다고 저녁에 꼭 만나자고 했다. 나는 현준이의 중대 발표가 터무니 없는 말일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수업이 끝난 후 딱히 할 일도 없어서 현준이랑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현준이랑 만나기로 한 호프집으로 갔다. 호프집 안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현준이가 먼저 와 있었다. 나는 현준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은혜랑 헤어졌어.”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현준이가 말했다. 현준은 폭탄 발언이라도 하듯 말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어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진작부터 현준이가 은혜랑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준은 사실 그 특유의 감언이설로 여자들을 많이 사귀긴 했지만 한 번도 3개월 이상을 넘긴 적이 없었다.
“이번엔 왜 헤어진 거야?”
나는 사실 현준이 왜 헤어졌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딱히 할 말도 없어 그렇게 물어 보았다.
“은혜랑 같이 모텔에 갔었어. 사랑을 나누다가 그 곳에 얼굴을 갖다 댔는데 시궁창 냄새가 엄청 강하게 나더라고. 다시는 여자랑 몸을 섞지 않을 거야.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너 변태냐? 거기다 얼굴은 왜 갖다 대?”
난 기가 막힌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난 성스러운 곳의 향기를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야. 근데 갖다 대는 순간 시궁창 냄새가 확 풍기더라고.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사람이 성기를 가리는 것은 그 곳이 성스러운 곳이어서인지 아님 더러운 곳이어서인지 하는 거였어? 넌 사람이 성기를 가리는 이유가 뭣 때문인 거 같아?”
나는 미친 놈을 쳐다보듯 현준이를 보았다. 그러나 현준은 내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쩜 말이야. 가장 더러운 것이 가장 성스러운 것인지도 몰라. 예수님도 더러운 마굿같에서 태어났잖아? 아니지. 아무리 그렇더라도 더러운 것은 그냥 더러운 것일 뿐이지. 더러운 것이 성스러운 것이라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돼? 그렇지 않아?”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참다 못해 나는 또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이냐면 더 이상 여자랑 그 짓 하지 않겠다는 거야. 시궁창 냄새는 정말 끔찍하다고. 아직까지 그 냄새가 나는 것 같다니까.”
현준은 정말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현준이 그렇게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여자의 그 곳에서 정말 시궁창 냄새가 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고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길래 현준이 저렇게 충격을 받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 또한 채신이의 그 곳에 얼굴을 파 묻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 변태취급 당할 것 같았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변태가 아니다. 채신과 섹스할 때도 점잖게 한다. 그래서 이젠 섹스도 별 재미가 없다.
“난 갈게.”
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사람을 불러놓고 가겠다니?”
“난 할 얘기는 다 했어. 너한테 중대발표를 했잖아? 그러니 이젠 가 봐야 겠어. 바쁘거든. 이 세상에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전무후무한 소설을 써야 해서 말이야.”
난 기가 막혔다.
“도대체 니가 무슨 소설을 쓴다고 그래? 허곤날 구상이나 하는 주제에. 소설 제목은 정했냐?”
“물론.”
“제목이 뭔데?”
“무제.”
정말 앞에 있는 물컵을 들어 현준이의 얼굴에 물을 확 뿌리고 싶었다. 그러나 연속극에 환장한 어머니 때문에 드라마를 많이 본 나는 그런 것은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나 하는 짓이지 남자와 남자사이에는 할 짓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그 수많은 연속극에는 여자가 여자한테 물 뿌리는 장면은 단골 메뉴였지만 남자가 남자한테 물뿌리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남자랑 남자는 주먹으로 싸운다. 그래서 나는 물 뿌리는 것을 그만두고 현준이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릴까 하고 생각했으나 역시 그런 일은 할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꾹 참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나의 인내심은 노벨상감이다.
“난 그럼 간다.”
“가든지 말든지 니 마음대로 해라.”
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현준은 호프집을 나갔다. 나는 혼자서 맥주와 돈가스 안주를 시켜 먹었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채신이가 한 음식을 먹는 일은 정말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조금 후 종업원이 술과 돈가스 안주를 내왔다. 나는 혼자서 천천히 그것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호프집안은 술 마시며 얘기를 하는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었고 간혹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참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을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인생을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또 재미없는 나의 하루가 간다는 것뿐이었다. 답답하다는 생가기 들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종업원이 나한테 다가왔다.
“손님, 여긴 금연인데요.”
나는 종업원을 째려보다가 일어났다.
“여기 얼마에요?”
“예?”
“얼마냐고요?”
“안 드시고 그냥 가시게요.”
“담배도 피지 못하는데 무슨 맛으로 술을 마셔요!”
나는 소리를 꽥 질렀다. 종업원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마냐니까요?”
“만삼천원이요.”
나는 만삼천원을 주고 나오다가 종업원을 돌아보았다.
“여기 이 근처에 담배 피면서 술 마실 수 있는 집이 어디에요?”
“예?”
“정말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이건 여기도 금연 저기도 금연이니. 아예 그럴바엔 담배 회사를 없애면 될 거 아냐? 담배회사는 국영기업으로 유지시키면서 담배를 못 피게 하는 경우는 대체 무슨 경우야? 세상에 이런 엉터리 경우가 어디 있냐고?”
나는 소리를 지를대로 질렀다. 친구들과 또는 연인과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내 큰 목소리에 놀라 다들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선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술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마신 후 연기를 내 뿜으니 성난 기분이 좀 가라 앉았다. 암만 생각해도 세상은 정말 재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