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이의 깔대기 이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채신, 어머니, 새 아버지 다 참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대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같이 한심해 보였다. 정말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인지
나는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한심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은 뭐 하나 싶어 현준이의 방으로 가 보았다. 방에 현준이는 없고 컴퓨터만 켜져 있었는데 마이크로 소프트 워드 화면에 깔대기 이론이라는 다섯 글자만이 크게 써져 있었다.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났다. 현준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이게 뭐냐?”
나는 컴퓨터에 써져 있는 글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그거 남들이한테 지면 안 될 거 갖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심사숙고 끝에 생각해 낸 거야.”
“엉?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면 남들이한테는 남들이 사상이 있잖아? 그래서 나도 아직까지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깔대기 이론을 생각해 낸 거야.”
“뭐?”
나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현준이를 보았는데 현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깔대기 이론이 뭐냐 하면 남자들이 모이면 처음 화제가 어떤 내용으로 시작하게 된다 할 지라도 5분도 채 못 지나서 결국은 이야기의 화제가 여자 이야기로 바뀐다는 거야. 다시 말해 여자 이야기만을 통과시키는 깔대기에 의해 다른 화제들은 다 걸러진다는 거지. 그나저나 내일은 달타령이 돌아오는 날이군.”
현준은 자신의 이론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는 것처럼 여자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같지도 않은 말에 화가 났다.
“이 한심한 백수야. 그런 쓰잘데 없는 생각은 집어 치우고 이제 좀 일이라도 하지 그래? 너 졸업한 후 2년을 넘게 놀았잖아? 니 누나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내가 현준이의 누나 얘기를 꺼낸 것은 누나 얘기를 꺼내면 그가 좀 자극을 받을까봐서였다. 그는 누나만은 끔찍이 생각하는 인간이었고, 솔직히 지금도 누나가 부쳐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것을 미안해 하고 있었다.
“누나한테는 좀 미안하긴 해.”
현준은 제법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역시 나의 생각이 적중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백수로 지내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무슨 이유? 세기의 명작으로 남을 소설을 구상중이라서?”
나는 비아냥 거리며 물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 구상같은 거야 다른 일 하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니까. 내가 이렇게 백수로 지내는 건 이 세상에 인간을 위해 필요한 일은 정말로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고. 니가 지금이라도 인간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나라도 생각해 내면 당장 백수 생활 집어 치우고 일하지.”
“너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야?”
나는 확신을 받듯 말했다. 자신이 있어서였다. 설마 지구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일들 중에 인간한테 필요한 일이 정말로 하나도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해 봐.”
현준은 여유를 보이며 말했다.
“의사.”
나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정말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갖고 말했다.
“넌 사람이 오래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하니? 난 의사들은 쓸데없이 사람들의 생명이나 연장시킨다고 생각해. 사실 지금도 죽지 못해 사는 인간이 수두룩하다고. 의사는 인간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야.”
듣고 보니 현준이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
“성직자.”
나는 성직자야 말로 인류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성직자? 성직자가 무슨 일을 하는데?”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잖아?”
“평화 좋아하네.”
현준은 코웃음을 치더니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인류에 일어났던 전쟁중에는 종교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수두룩해. 오히려 종교가 없었다면 인류가 훨씬 더 평화스러웠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또 현준이의 말에 홀렸다. 종교가 사람들한테 평화를 주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갈등만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
나는 물론 내가 훌륭한 선생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 다시 말했다.
“나보고 너같은 선생이나 되라고? 게다가 달타령은 이 땅에선 교육자가 설 자리가 없다면서 중국으로 떠났다고. 그리고 말야, 너같은 어른들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이 어른들한테 배워야 제대로 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배우면서 크는 게 아니라 스스로 크는 거야.”
현준이의 말은 결국 선생도 인간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였고, 나는 또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다.
“변호사는 어때?”
처음에 자신이 있던 나의 목소리엔 이제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변호사란 자기를 고용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말같지도 않은 논리나 펼치는 인간이야. 설마, 넌 지금 그런 일이 인간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기자는 어때?”
나의 목소리는 이제 모기소리만큼 작아졌다.
“넌 기자가 진실을 말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냐? 그들은 진실에 목마른 인간들이 아니라 특종에나 목마른 인간들이야.”
대통령이라고 퍼뜩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현준은 자기 나라 국민들을 향해 총 겨누라고 한 인간이나, 또는 남의 나라 사람들한테 총을 겨누라고 하는 인간이 넌 지금 인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라고 반문할 게 뻔했다.
갑자기 그한테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세상의 그 많은 일들 중에 인간을 위해 필요한 일이 하나도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마땅한 일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현준이 말했다.
“이제 왜 내가 놀고 있는지 알겠지. 인간이 일을 하는 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근데 난 먹고 살만큼의 돈은 있거든. 그래서 인간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을 위한 일이 없더라고. 그래서 그냥 놀고 있는 거야.”
“그게 니 돈이냐? 다 니 누나 돈이지? 그리고 그렇게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소설가는 왜 되려고 해? 내 보기엔 소설가도 인간한테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은데. 종이쪽지에 글 몇 자 적는다고 세상이 변하냐?”
“이 봐, 친구. 질문을 하려면 하나씩 해야지. 어쨌든 차근차근 대답해 주지. 물론 지금 누나한테 돈을 얻어쓰고 있지만 나중엔 누나한테 다 갚을 거야.”
“무슨 수로? 허곤날 노는 인간이 돈이 어디서 생기냐?”
“내가 말했지. 넌 그래서 순진한 인간이라고. 논다고 돈이 안 생긴다는 법이 어딨냐? 어느 날 갑자기 복권에 당첨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또 내가 쓴 소설이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는데. 그럼 이번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지. 내가 왜 소설가가 되려 하느냐고 물었지? 그래도 백수보다는 소설가가 낫잖아? 그래서 한 작품만 쓸려 하는 거라고. 한 작품만 쓰고 나면 그 후로 백수처럼 놀아도 그땐 소설가라고 불릴 테니까. 이제 대답이 됐겠지? 또 알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 봐.”
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현준이를 보았다.
“알고 싶은 거 더 없으면 그만 니 방으로 가라고. 난 깔대기 이론을 정리해야 되니까.”
현준은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깔대기 이론이란 남자들이 모이면 처음 화제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간에 결국 5분도 지나지 않아 남자들의 화제는 여자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남자들한테는 여자 이야기만을 통과시키는 이상한 깔대기가 있으며 필자는 그 이상한 깔대기를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나는 현준이의 한심한 행동을 지켜보다가 방을 나왔다. 내 방으로 들어와서 TV를 켰는데 홈쇼핑 광고를 하고 있었다. 쇼핑호스트가 상품과장 광고를 하고 있었는데 현준이의 말에 홀렸는지 저런 일이 인간한테 뭐 그리 필요한 일이라서 저런 일을 하는 사람 연봉이 1억이 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쁜 여자 쇼핑호스트가 재수가 없어져서 채널을 돌렸다. 미국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한국투수가 선발로 나온 야구경기였다. 요즘 사람들은 그 투수한테 열광을 하고 있다. 그는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다. 물론 야구공을 시속 150- 160km으로 던질려면 그 투수는 어렸을 때부터 무진장 노력을 했을 거였다. 하지만 대체 야구공을 시속 150-160km으로 던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 선수는 그렇게 피땀나는 노력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현준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책 좀 찾으러 왔어.”
“깔대기 이론은 다 썼냐?”
내가 비아냥 거리며 물었다.
“아직. 그나저나 저 인간들 참 한심하지 않냐? 사람을 맞혀 죽일 수 있는 스피드로 공을 던지는 것도 그렇고 그걸 맞히려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도 그렇고.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달타령뿐이야.”
“달타냥은 너의 깔대기 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
나는 여전히 비꼬며 물었다.
“당연히 최고라고 하겠지. 이전에도 나온 적 없고 앞으로도 나올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전무후무한 이론이라고 할 거야.”
난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현준이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때 한국투수가 던진 공이 그만 타자의 머리쪽을 향하는 빈 볼이 되었다. 화가 난 미국 선수는 한국 투수한테 달려들었고 각팀의 선수들이 싸우기 위해 두사람한테로 달려들어 야구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 난 말야 야구가 스포츠인지, 패싸움인지, 돈장사인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어. 어느쪽이든 인간한테 도움 안 되는 거는 마찬가지지만.”
현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찾던 책을 찾은 후 방을 나갔다. 나는 패싸움을 보기 싫어 TV를 돌렸다. 그러나 어느 채널을 돌려도 정작 인간을 위해 필요한 방송은 하질 않았다. 갑자기 나는 인간의 삶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껴져 한강으로 뛰어가 투신자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현준이 때문이다. 하여튼 그 인간은 정말 알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내일 돌아오는 달타냥을 생각했다. 달타냥을 생각하자 우울했던 기분을 그나마 조금 떨칠 수가 있었다. 역시 나한테는 달타냥이 필요하다. 근데 나는 며칠 후면 채신과 결혼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작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꿈인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라도 꾸고 싶어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