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달타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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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타냥이 돌아왔다. 나는 업무를 끝마치자마자 서둘러 학교를 나왔다. 우리 삼총사가 달타냥의 귀국을 축하하기 위해 신촌에서 달타냥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지하철로 걸어가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달타냥 생각뿐이었다. 달타냥이 어떻게 변했을까도 궁금했으며 지난 날 우리 삼총사와 함께 했던 달타냥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다시 달타냥 얘기다. 달타냥은 평소에 항상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한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녀의 노트를 두 번만 보면 그 과목은 A+는 따 논 당상이라는 말이 돌았고, 실제로 달타냥이 노트를 두 번 읽은 아이들은 모두 그 과목에서 A+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달타냥 자신은 성적이 좋질 못했다. 그녀의 성적표는 주로 D대였고 그녀가 학교를 자퇴하기전까지 최고 높은 점수를 받은 학점은 C+였다. 내가 이런 얘기 하면 혹시나 당신들이 달타냥을 공부는 죽도록 열심히 하는데 정작 시험때는 요점을 잡지 못해 시험을 망치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달타냥은 절대로 그런 바보같은 인간이 아니다. 달타냥의 성적이 안 좋았던 것은 그녀는 시험에는 관심이 없어서 시험을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타냥은 평소때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기간에는 집에서 잠을 자거나 여행을 떠나는 등 도무지 일반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안가는 행동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달타냥이 하도 이상해서 우리 삼총사와 달타냥이 함께 술을 마시던 날 달타냥한테 물어보았다. 그 날은 마침 중간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넌 평소에는 공부를 꽤 열심히 하면서 왜 시험기간엔 시험을 보지 않는 거야?”
“그러게 말야. 시험을 보지 않을 생각이면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잖아?”
남들이도 나처럼 의아해했다.
“난 학생인데 당연히 공부는 해야지.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거니까. 시험을 안 보는 건 시험 때문에 공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야. 솔직히 A, B, C, D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달타령. 역시 넌 멋져. 나도 앞으로는 너처럼 평소에 공부하고 시험성적엔 연연해 하지 않겠어.”
현준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듯이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이전에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시험성적에만 연연해 했던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연연한 시험성적이라는 것이 고작 전공과목 F를 피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는 D-를 맞아도 목표를 이루었다고 웃는 인간이었다. D-도 수강한게 인정이 되는 학점이어서 재수강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현준이가 비장한 각오로 말하길래 달타냥의 말에 감동받고 공부를 좀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완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그는 여전히 공부하지 않았고, 예전엔 시험엔 그래도 신경을 쓰던 녀석이 시험마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고는 달타냥이 자신한테 자유를 주었다고 외쳤다. 얘기가 잠깐 다른데로 흘렀는데 다시 달타냥 얘기를 하겠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해석학 첫 수업 시간에 달타냥은 늦게 강의실에 도착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정년을 얼마남기지 않은 교수는 지각생을 끔찍이 싫어했다. 또 그는 지각생이 여자면 더 싫어했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달타냥을 보던 교수는 달타냥이 중간고사 시험점수를 어떻게 받았는지 알아보려고 학생들의 성적을 살펴보았는데 달타냥이 시험을 치르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결국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학생은 뭐 하는 인간이야? 시험도 안 보고. 허곤날 지각이나 하고.”
교수의 말은 틀렸다. 달타냥은 허곤날 지각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달타냥은 그 때 처음으로 그 수업에 늦었다.
“죄송합니다.”
달타냥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학생, 리만의 판정법이 뭔지 알아?”
교수는 니가 그런 걸 알겠냐는 듯이 완전히 깔보며 말했다. 하지만 달타냥은 그런 것을 모를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달타냥은 어른한테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인간이라 나즈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는데요.”
“로비탈의 법칙은?”
교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또 달타냥을 무시하며 물었다.
“모르는데요.”
달타냥은 역시 예의를 지키며 대답했다.
“Bolzano-weierstrass의 정리는?”
“모르는데요.”
“드모르간의 법칙은?”
“모르는데요.”
“도대체 아는 게 뭐야? 혹시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아나?”
교수는 달타냥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내 동생 정연이마저도 아는 것이었다.
“모르는데요.”
달타냥은 교수가 그렇게 자기를 무시하는데도 역시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 교수는 기가막히다는 듯이 달타냥을 보았다.
“저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
“아는 거 하나 없으면서 수업은 들어서 뭐해? 니 부모님이 불쌍하다. 너같은 걸 믿고 널 공부시킬려고 대학에 돈을 쳐 들이니? 하긴, 뭐 자업자득이긴 하지. 니 부모님이 머리가 돌이니까 너같은 돌이 나온 거겠지. 넌 수업 안 들어도 되니까 그냥 가.”
“그래도 전 수업 들으러 왔는데요.”
달타냥은 교수가 자신의 부모를 욕한 것에 화가 나서 말했다.
교수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칠판으로 가서는 칠판에 문제를 적기 시작했다. 10문제를 적었는데 10번 문제만이 조금 수준이 높았을 뿐 나머지는 중간고사 수준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니가 이 문제중에 한 문제라도 증명을 하면 들어가도 좋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냥 가라고. 너같은 건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으니까.”
교수는 달타냥이 한 문제도 증명해 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틀렸다. 달타냥은 한문제 한문제를 막힘없이 증명해 나갔다. 교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달타냥은 10번 문제는 잘못됐다고 했다. 나는 교수가 그걸 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정말 교수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교수도 인간인 이상 충분히 실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수는 실수를 해 놓고도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교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달타냥은 잘못되어 있는 부분을 지적했고, 교수는 그게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반박했다. 두사람의 논쟁이 벌어졌고, 교수는 달타냥의 논리정연한 말에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교수는 ‘요즘 젊은 것들은 하나같이 버릇이 없어. 어른한테 기어오르기나 한다니까. 세상이 어떻게 될려는 건지.’ 하고 소리치고는 강의실을 나갔다. 수업은 졸지에 휴강이 됐고, 학생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생각없는 현준은 휴강이 된 것을 기뻐하며 우리한테 즉석떡볶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달타냥, 근데 앞으로 어떡할 거야?”
우리 삼총사와 달타냥이 같이 즉석 떡볶이를 먹고 있을 때 현준이가 물었다.
“뭘?”
“그 교수한테 한 번 찍히면 시험을 암만 잘 봐도 F를 벗어날 수가 없잖아? 넌 이제 그 교수한테 완전히 찍혔다고.”
“그게 무슨 걱정이야? 그냥 F받고 다음에 재수강 하면 되지.”
달타냥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역시 넌 멋져.”
현준이가 또 달타냥을 추켜 세웠다.
기말고사 때 달타냥은 시험을 쳤고, 과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백지를 낸 현준이가 D+를 받았는데도 달타냥은 F를 받았다. 달타냥은 그것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현준은 세상에 이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그리고는 당장 그 교수한테 가서 따지겠다고 했다. 그러자 달타냥이 그를 말렸다.
“됐어. 그만 둬.”
“넌 화도 안 나니?”
“성적이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까.”
“역시 넌 마음도 넓어. 내가 이런 일을 겪었으면 그 교수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당장 그 교수 퇴진서명운동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을 거라고.”
“단식 끝내고 또 맛있는 거 엄청 시켜 먹으려고?”
나는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사실, 현준이는 단식투쟁을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고 등록금 투쟁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그가 그래도 생각있고 실천하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건 완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일주일 후 단식을 끝내고, 그는 짜장면에 탕수육, 팔보채를 시켜 먹었다. 그렇게 시켰으니 서비스로 군만두까지 나오는 것은 당연했고, 그는 그것을 혼자 먹었다. 나는 현준이가 그걸 다 먹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그가 왜 단식투쟁 같은 것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굶고 엄청 맛있는 거 시켜 먹는 거라면 나도 충분히 할 수가 있을 거 같았다.
“너 이렇게 맛있는 거 엄청 시켜 먹을려고 단식했냐?”
“단식에 성공했으니까 먹는 거야. 니가 일주일을 굶어봐. 얼마나 배고픈지 알아?”
“성공이라니? 등록금은 조금도 내리지 않았잖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일주일만 투쟁한다고 했고, 일주일은 채웠으니 내 몫은 다 한 거야. 나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고. 내가 이 학교 이사장도 아니잖아?”
나는 기가막힌 얼굴로 그를 쳐다보면서 그 때 세상에서 단식투쟁이야 말로 가장 멍청한 투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달타냥과 남들이는 이미 와 있었는데 현준이는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들한테로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달타냥은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나는 2년만에야 달타냥을 보는 것이라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2년전과 달라진 것 없는 그녀는 역시 이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여기서 사람의 외모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 주길 바란다.
“현준이는?”
“아직 안 왔어.”
달타냥이 대답했다.
“또 은혜랑 노는가 보군.”
“은혜라니?”
달타냥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정찬이네 반 학생이야. 그 인간은 이젠 친구반의 학생하고 그 짓하고 다닌다고.”
남들이가 말했다.
“그래?”
달타냥은 제법 흥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난 말야 친구녀석이 그러고 다니는데 신경 끄고 사는 이 인간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인간은 더 이해가 안 돼. 넌 그 인간이 이해가 되니?”
“뭐, 그럭저럭. 원래 그러고 사는 인간이잖아? 근데 그 학생한테도 자기가 신춘문예에 당선한 대단한 작가라고 속였나 보지? 그런 거야?”
달타냥이 나한테 물었다.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몰라.”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문학에 환상이나 품고 있는 순진한 여고생을 자기가 대단한 작가라고 하면서 또 속였겠지.”
달타냥은 안 봐도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달타냥의 말처럼 현준은 여자를 만날 때마다 자기가 신춘문예에 당선한 작가라고 속였다. 그의 외모가 예술가 타입이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만나는 여자마다 현준이의 그 말에 다 속아 넘어갔고 현준이를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현준이가 자신이 쓴 소설이 당선되어 실렸다는 신문을 찾아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니 현준이가 자신한테 거짓말 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고, 친구들한테 현준이를 신춘문예에 당선한 작가라고 소개했다. 내 남자친구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친구들한테 뽐내면서. 조금 현명한 여자들은 현준이가 자신이 쓴 소설이 당선되어 실렸다는 신문을 찾아 읽어보았다. 현준이의 이름이 쓰인 소설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속은 것에 화가 난 여자는 현준이를 찾아와서 따졌는데 현준은 태연하게 그 이름은 자신의 가명이라고 했다. 그럼 또 화가났던 여자는 현준이한테 자신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랬다며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 때 여자들이 현준이의 말에 다 속은 것은 아니다. 그 이름이 현준이의 가명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여자도 몇 명 있었는데 그럼 현준이는 사실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면서 강남에 아파트가 세 채나 있다고 했다. 그 말 또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누나한테 돈이나 얻어 쓰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현준이의 말에 혹해 반신반의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또 현준이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강남에 아파트가 세 채나 있다고 한 현준이의 말 또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여자들은 너 같은 인간하고는 더는 상종 안 한다며 헤어졌다. 그럼 그는 미련 없이 잘 가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인간이 왜 그러고 다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적어도 사람을 속일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려고 하던가, 아님 저 사람은 너무 마음에 들어 사귀고 싶은데 자신은 너무 볼품이 없어 그 사람이 자신을 봐주지도 않을 것 같아 속이는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준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여자들한테 밥먹듯이 거짓말을 했으나 그렇다고 여자들의 돈을 탐낸 적은 한 번도 없으며, 그 여자가 너무 마음에 들어 여자를 사귀고 싶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난 그한테 왜 그러고 사냐? 하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는 ‘재밌잖아?’ 하고 대답하며 이 다음에 할 일 없으면 사이비 교주라도 해야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그 때 그가 사이비교주로 나선다면 대성공할 것이라고 느꼈다. 일단은 그 이상한 외모가 받쳐주고 있었고, 게다가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말이다. 이제까지 그가 거짓말로 속이지 못한 여자는 단 세사람뿐이었다. 첫 번째 여자는 그의 누나로 그의 누나는 현준이의 말이면 현준이가 아무리 개같은 소리를 하더라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다 믿는다. 예를 들면 현준은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하면서 세계 최고의 명작을 쓸 거라고 큰소리 치는데 아무도 믿지 않는 그 얘기를 현준이 누나만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는다. 일이 이렇게 되면 도무지 누가 누구를 속이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현준은 그런 누나를 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살아있는 사람중에서 유일하게 존경하고 있다.
현준이가 속이지 못한 두 번째 여자는 남들이의 부인인 정숙씨다. 정숙씨는 천연미인이다. 칼로 얼굴을 뜯어고쳐 이뻐진 채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너무나도 아름답다. 나는 정말 이쁜 여자를 보면 재채기를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정숙씨를 처음 봤을 때도 재채기를 했다. 서른 한 해를 살아오면서 내가 여자 때문에 재채기를 한 적은 그 때까지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사춘기 때 내가 너무 좋아했던 탤런트를 길거리에서 보았을 때였고, 또 한 번은 남들이가 자신의 신부될 사람을 소개시켜준다고 해서 나와 현준이가 남들이랑 같이 정숙씨를 만났을 때였다. 나는 그 때 현준이가 또 정숙씨한테 쓸데없는 거짓말이나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현준은 정숙씨한테 한 마디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 부인이 될 사람이니 예의를 지키려나 보지 하고 생각했는데 암만 생각해도 이상했다. 현준은 그런 걸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남들이와 헤어진 후에 나는 현준이한테 말했다.
“니가 웬 일이냐? 오늘은 여자한테 거짓말을 안 하고 말야. 친구 부인이 될 여자라서 그러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정숙씨 너무 이쁘지 않니? 그렇게 이쁜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 봐서 말이야. 난 사실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나도 남자라서 너무 이쁜 여자한텐 약한 게 내 유일한 약점이거든. 앞으로는 나의 약점을 좀 보완해야겠어. 시도를 했는데 정숙씨가 속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건 내 일생 일대 최대의 수치라고. 두고 봐. 언젠가는 반드시 정숙씨를 속일테니까. 사실 외모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만 터득하면 이쁜 여자 속이는 건 식은 죽 먹기거든.”
나는 그 때 기가막혀 현준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자한테 의미없는 거짓말이나 하는 그런 쓰잘데 없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다 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현준은 아직도 정숙씨한테 거짓말 하는 건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정숙씨를 만나고 올 때마다 ‘또 실패야. 막상 만나기 전에는 계획을 다 짜 놓았는데 정작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생각했던 말들이 다 흩어지고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난다니까. 눈을 감고 시도해 볼까. 아니야, 그럼 내가 지는 거라고. 눈을 뜨고 똑바로 보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야지.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사시키겠어.’ 하고 다짐만 했다.
현준이의 거짓말에 속지 않은 마지막 한 명의 여자는 당신들이 짐작했을 것 같은데 달타냥이다. 현준은 달타냥한테도 자신이 쓴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실렸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달타냥은 ‘그게 뭐 대단한 일이야?’ 하고 반문했다.
“넌 지금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현준이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때까지 그런 식으로 반문한 여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지. 그게 뭐가 대단해? 그리고 넌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그런 일조차 한 적 없는 별볼일 없는 인간이야.”
“무슨 소리야?”
“니가 신춘문예에 당선했을 리가 없어. 니가 쓴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면 내 손에 장을 짓지.”
“이제보니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거군. 너무 그렇게 사람을 의심하면 안 돼.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아?”
“좋아, 그럼 내기해.”
“무슨?”
“니가 쓴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면 내 손에 장을 짖을테니까 그게 아니면 니 손에 니가 장을 짖어.”
“야, 내 말은 사실이라고.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
현준은 제법 여유있게 말했다.
“그럼 가자.”
“어딜?”
“도서관에. 니가 쓴 소설이 실려있다는 신문을 찾아봐야 할 거 아냐? 너 내기는 내기인 거야. 니 말이 맞으면 내 손에 장을 짖을 테니까 내 말이 맞으면 니 손에 장 짖는 거야.”
달타냥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야, 그건...”
현준은 달타냥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왜? 공평한 내기잖아?”
결국 현준이의 거짓말은 들통났다. 나는 그 때 달타냥이 어떻게 현준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아무튼 달타냥은 아무도 꿰뚫어보지 못한 현준이의 거짓말을 알아낸 여자고, 그 날 이후로 늘 결혼은 미친짓이라고 말하던 현준이는 자기가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신부는 달타냥일거라고 했다.
“곧 결혼한다며? 채신씨랑?”
달타냥이 물었다.
“응. 내 인생도 이젠 끝장이야. 아는 건 영어밖에 없는 그 멍청한 여자랑 결혼해야 하니.”
“왜 그래? 채신씨는 좋은 여자야.”
확실히 달타냥은 마음도 넓다. 나는 여태까지 그녀가 남을 욕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멍청한 채신이를 보고 난 후에도 참 이쁘고 착한 여자라고 했다. 반면 채신은 달타냥을 보고 난 후 정말 못 생긴 여자라고 욕했다. 나랑 결혼할 사람이 채신이 아니라 달타냥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또 했다.
우린 1시간이 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현준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그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튼 그 인간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너 돌아온다고 하니까 제일 좋아한 인간이 그 인간이었다고. 근데 1시간이나 늦다니? 이게 말이 되나?”
남들이가 또 한소리 했다.
나는 현준이한테 전화를 걸어보았다. 신호음이 가더니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지금가고 있어. 30분안에 도착할 거야.”
“지금까지 뭐 했던 거야?”
“달타냥한테 줄 선물 좀 준비하느라고. 금방 갈게.”
그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 온대.”
“뭐 하다 이제 오는 거래?”
남들이가 물었다.
“달타냥한테 줄 선물 준비하고 있었대.”
“그래도 그 인간이 너 좋아하긴 정말 좋아하나 봐. 선물까지 준비할 생각을 다 하고 말야.”
남들이가 말했다.
“솔직히 기대되는군. 현준이가 준비한 선물이라.”
30분 안에 도착한다던 현준은 1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는 달타냥을 보자마자 어렸을 때 생이별을 했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오버를 하며 반겼다.
“내가 널 위해 대단한 선물을 준비했어.”
현준은 호치케스로 오른쪽 귀퉁이를 찍은 A4용지를 건네주었다. 세질 않아서 정확한 장수는 알 수 없었지만 눈대중으로 보니 20장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이게 뭐야?”
달타냥이 물었다.
“내가 창시한 깔대기 이론이야. 남들이 사상같은 건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멋진 이론이지.”
나는 기가 막혔다. 남들이도 뭐 이런 인간이 있나 하는 눈으로 현준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현준이는 나와 남들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검토해 줄 사람을 찾았는데 역시 내 생각에 제대로 검토를 해 줄 사람은 너 밖에 없는 거 같아. 그러니 검토 좀 해 줘.”
“한 번 해 볼게.”
달타냥은 그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달타냥은 마음이 넓다.
“아주 돌아온 거야?”
“아니. 이라크로 떠나기 전에 잠깐 들른 거야.”
“이라크? 이라크는 갑자기 왜 가려고?”
“평화를 지키러 가기로 했어. 지구에서 전쟁은 사라져야 하는 거니까.”
확실히 달타냥은 세계 평화를 생각하는 가치관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다. 쓸데없이 단식투쟁이나 하는 현준과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도 거긴 너무 위험하잖니?”
남들이가 걱정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가야지. 전쟁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눈 딱 감고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넌 정말 멋져. 근데 이라크로 떠나기 전에 내 깔대기 이론은 검토 좀 해 주고 가라.”
“넌 지금 농담이 나오냐? 달타냥이 전쟁터로 가는데.”
남들이가 어처구니없어 하며 물었다.
“농담 아냐. 진담이라고. 내 깔대기 이론은 니 남들이 사상보다 훨씬 훌륭해. 금방 나온 따끈따근한 이론이라고. 그리고 내가 말린다고 달타냥이 안 갈 애는 아니잖아?”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우리가 말린다고 해서 달타냥이 안 갈 인간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는 의지력이 있는 멋진 여자였다.
“검토는 해 주지. 그리고 난 정찬이 결혼은 보고 떠날 거야. 친구 결혼인데 축하는 해 줘야지.”
우린 30분동안 더 술을 마셨고, 다음에는 남들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기로 하고 헤어졌다. 남들이는 그 때 나한테 채신이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 주는 건 남들이 다 하는 일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