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 오늘 만화방에서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계산하려고 나왔는데 마침 그녀가 누구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나부다. 계속 웃는다. 날 보는 눈짓이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는 것
같다. 오래 해도 돼요..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오랫동안 그녀 얼굴 쳐다본 적이 그전에 있었던가..?
행복하다.
만화방아가씨 :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 기분이 심난해서 오늘밤에 여기로 온다 그런다. 친구와
그렇게 전화를 하는데 그 백수 녀석이 계산대에 왔다. 그의 얼굴을 보니 코 위에 짜장이 엄청 묻어 있
다. 저렇게 생긴 것두 웃긴데 짜장 까지.. 막 웃었다. 친구가 얘기하다 말고 왜 자꾸 웃느냐고 지랄을
했다. 뭐가 묻었는지도 모른 채 그는 행복한 표정이다.
백수 : 예전 만화방 주인일 때는 만화방도 대신 봐주고 그랬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그렇게 줄기차게
다녔는데도 그런 부탁하나 안 한다. 내가 의심스럽게 보였나? 하기야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백수한테
가게 맡길 사람이 어디껏나..
만화방아가씨 : 내일은 내친구 결혼식이다. 삼촌이 요즘 바빠서 만화방을 못 봐준다고 그랬다. 할 수
없이 내일은 문을 닫아야 하나... 그 백수녀석이 떠올랐다. 나쁜 녀석 같지는 않다. 아니 착한 거 같다.
그에게 내일 하루만 봐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다.
백수 : 오늘 그녀가 내일 만화방 좀 봐달라고 했다. 기뻤다. 날 믿는다는 증거다. 이일을 계기로 그녀
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오늘밤은 그녀생각에 잠이 오질 않는다.
만화방아가씨 : 그가 아침 일찍 왔다. 제시간에 화장을 끝마쳤다. 그에게 열쇠와 오늘 신간 값 치를 3
만원을 맡겼다. 그가 어디 가느냐며 물었다. 날 아줌마로 아직 생각하고 있을까봐 선보러간다고 말했
다. 내가 아줌마 아닌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그가 씁슬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제는 아줌마 소
리는 안 하겠지.. 그가 내 얼굴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화장이 잘못되었나..? 괜히 신경이 쓰인다.
백수 : 아침 일찍 그녀의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뽀얗게 화장한 그녀 모습이 아름다웠다. 용기를 내어
어 디가냐고 물었다. 선보러 간다고 했다. 슬펐다. 미웠다. 밝히는 여자니 이번 달 내로 시집을 가 버
릴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진하다 싶게 화장한 그녀 얼굴이 꼭 헤픈 술집 여
자같이 보였다.
만화방아가씨 : 친구가 예쁜 드레스를 입고 사랑하는 남자와 행복하게 그 둘만의 인생 길을 떠났다.
사랑하는 맘에서 꾸밈없이 나오는 행복한 웃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맑았고 아름다웠다. 그
런 그 둘 앞에 내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축하는 해주었지만 왠지 내 마음한구석이 공허하다. 만화방
으로 돌아왔다. 그 백수가 내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졸구 있었다. 내가 졸던 모습도 저러했을까 생
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가 날 쳐다봤다. 고마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석이 날 보더니 "오늘 선
본 남자가 굉장히 맘에 들었나 보죠..?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네.."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저 백수녀석은
좀 좋아질려 하면 꼭 먼저 초를 친다. 기분이 나빠서 다 다음주에 시집갈 날을 잡았다고 거짓말을 했
다. 그가 한참 머뭇거리더니 "그럼.. 으..하여간 시집 잘 가쇼.. 아줌마..! 그리고 오늘 번 돈 8만 칠천
구백 구십 원하구 아까 신간 값 치루고 남은 삼천 오백 원 여기 서랍에 넣어 두었소.. " 그리구선 홱
나가 버렸다. 뭔가 급한 볼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늦게 와서 삐진 걸까..? 오늘 만화방 봐 준거에
대한 고마움은 다음에 해야겠다. 그 백수녀석 여전히 속 하나는 좁은 거 같다.
백수 :그녀가 선본다는 게 분했다. 어떤 녀석이 만화책값으로 10원 짜리 스무 개를 냈다. 열 받는데
석유를 붓는 거 같았다. 그 중 한 개를 냅다 그 녀석한테 던졌다. 근데 이 녀석이 쉽게 피해버렸다. 괜
히 10원만 잃어 버렸다. 그녀 방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깨끗하게 정돈된 자그마한 방이었다.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종일 그녀가 X나게 맘에 안 드는 놈이 선보는 자리에 나오라 기도했다. 근데 뭐가
기분이 좋은지 그녀가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절망의 벽을 느꼈다. 열 받으니 말이 술술 나왔다. 흑흑..
그녀가 다 다음주에 시집을 간댄다. 나는 어떡하라고 .. 눈물이 앞을 가려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내 마
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너무 야속했다.
만화방아가씨 : 아침에 만화방 청소하다가 십원 짜리 하나를 주웠다. 오늘따라 왠지 그가 기다려진다.
만화방 봐 준거 뭘로 보답할까 고민이다. 돈으로 보답할까? 너무 정이 없어 보인다. 곰곰히 생각하다
영화본지도 오래되고 해서 그 녀석하구 영화나 보러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해 이
번 주 토요일저녁에 요즘 인기 최고인 영화 표 두장 예매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이 영화 싫어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된다.
백수 : 오늘로 대기발령 육 개월째고 집에서 놀기 시작한지 구 개월째다. 여전히 내일기장엔 그녀이름
이 꼬박꼬박 적히고 있다. 오늘 놀이터 벤취에 앉아서 담배연기로 그녀 얼굴을 그려보았다. 선본 남자
는 어떤 놈일까 생각해 보았다. 백수는 아니겠지.. 그녀가 보고싶지만 나두 존심 있는 남자다. 그래서
만화방에 가지 않았다. 며칠 밤을 그녀가 보고싶어 꺼이꺼이 울었다. 엄마가 취직이 안되어 우는가하
고 기운 내라며 곰탕을 끓여 주셨다. 곰탕을 먹을 때마다 어머니께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며칠째 만
화방을 멀리서 쳐다만 보고 돌아왔다.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벽에 붙은 영화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인기최고인 영화다. 재밌을 거 같다. 불현듯 이번 주말에 그 선본 놈하고 그녀가 이 영
화를 보러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배아프고 슬펐다.
만화방아가씨 : 백수녀석이 며칠째 안 보인다. 오늘로 오 일째다. 만화방 봐준 거 사례로 주말에 같이
영화 볼려고 예매한 티켓을 보니 마음이 조마해진다. 그녀석이 내일도 안 오면 어떡하나.. 혹시 이사를
간 게 아닐까? 취직이 되어 바쁜 거 아닌가?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수 : 저녁 무렵에 또 만화방을 멀리서 쳐다보았다. 문이 닫혀 있었다. 정말로 그 녀석하고 영화를
보러 간 걸까? 진짜 야속한 여자다. 내가 이렇게 가슴아파 하고 있는걸 알까?
만화방아가씨 : 오늘도 그녀석이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슬프다. 영화티켓을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
다. 마음도 심난한데 이 영화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티켓 예매해준 친구를 불러 같이 보았다. 진한
감동의 여운을 주는 영화였다. 근데 자꾸 이 영화주인공 얼굴과 그 녀석 얼굴이 교차되어 들어온다.
그냥 피식 웃고만 말았다.
백수 : 삼 일째 만화방 문이 닫혀 있다. 결혼식 준비하느라 바쁜가 보다. 야속한 여자야 그래 잘살아
라. 하기야 백수인 나를 그녀가 관심이나 두었겠나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머니한테 나두 장가가게
선 좀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돈도 못버는 게 무슨 장가를 가겠다고 하냐며 딸딸이를 던지셨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맞았다. 아팠다. 그리구 슬펐다.
만화방아가씨 : 저녁부터 머리가 아프고 몸이 떨렸다. 몸살이 온거 같다. 다음날 아침에는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몸이 말을 안 들었다. 홀로 열이 나는 머리를 식힐려고 수건에 물을 적셔왔다. 힘들고 서글
펐다. 그 다음날은 더 아팠다. 약을 사올려고 했지만 일어날 기운이 없다. 저녁에 조금 한기가 가셔서
죽을 쑤어 먹었다. 빨리 나아야 할텐데.. 그녀석이라도 있었으면 약사오라는 심부름이라도 시킬 수 있
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 친구에게 전화를 해 도움을 청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약도 사먹고 해서 아프기 시작한지 3일만에 나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이제 혼자서
아픈 몸을 돌볼 수 있겠다 싶어 친구를 집에 돌려보냈다. 4일째 여전히 몸이 별루 안 좋았지만 그 백
수녀석이 혹시 올까봐 만화방 문을 열었다. 그치만 그는 오지 않았다.
백수 : 그녀를 어떻게 잊을까 생각중이다. 결혼하면 제발 만화방 때려치우고 딴 데로 이사를 갔으면
좋겠다. 그녀가 말한 대로라면 오늘이 그녀의 결혼식 날이다. 축하나 해줄까?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
으로... 멀리서 만화방을 쳐다보았다.. 근데 만화방이 영업중이다. 아마 딴사람이 봐주고 있는 모양이다.
독한 여자다.. 생활력이 강하다고 봐야하나...? 에라 잘됐다. 이참에 못 본 만화책이나 실컷 보고 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만화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만화방아가씨 : 드디어 그가 왔다. 깨재재한 모습으로.. 내가 그렇게 아팠는데 단골이라는 놈이.. 내가
무 얼했나 걱정도 되지 않았을까..? 무척 반가웠지만 최대한 원망하는 눈으로 째려봤다. 하지만 왜 그
랬을까. 아팠던 거 때문일까. 눈물이 찔끔 나왔다.
백수 : 들어서자마자 흠칫 놀랐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빗자루로 만화방 바닥을 쓸구 있
었다. 왜 그녀가 여기 있지..? 결혼식이 내일인가..? 그래도 오늘은 엄청 바쁠 텐데.. 어제였나? 어제라
면 신혼여행을 갔어야지.. 하여간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그토록 그리워한 여인이었기에.. 결혼식
이 파토났나? 연기되었나.? 뭔가 분한 게 있는지 나를 째려봤다. 내가 뭘 어쨌다고.. 만화방바닥에 먼
지가 많았나보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걸 보았다. 눈을 불어주고 싶었지만.. 들고있는 빗자루가
맞으면 상당히 아플 것 같은 무기로 보였다. 그래서 참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 있다가 용기를 내
어 한마디했다. "결혼식 연기됐어요? 아줌마.."
만화방아가씨 : 이 자식이 여전히 아줌마라고 그런다. 결혼은 또 무슨 말이냐..? 혹시 그때 내가 결혼
한다고 말한걸 진짜로 믿은 거 아냐? 진짜 바보다. 어떻게 선보고 그날 바로 날을 잡을 수 있나. 이런
바보 녀석이 아직 존재하다니.. 그러니 백수로 지내고 있지.. 누가 결혼한다고 그랬냐며 엄청 쫑을 주
었다.
백수 : 그녀가 결혼 안 한다고 했다. 너무 기뻤다.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빗자루를 들
고있다. 내일부터 또 만화방에 줄기차게 나와야겠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줌마 내일 봐요."하고 인사
도 하고 나왔다.
만화방아가씨 : 그녀석이 끝까지 아줌마라고 놀리고 나갔다. 하지만 내일부터 그가 다시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