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 점점 그녀가 좋아진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눈에 띄게 할까 고민이다. 만화방에 오는 모든 녀
석들과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그러나 그녀한테 말 건네는 게 이제는 부담스럽다. 점점 그녀
앞에 위축되어 가는 거 같다. 그녀가 내 얼굴이나 알까..?
만화방아가씨 : 오늘도 그 백수녀석이 왔다. 다른 놈들보다 유독 그가 눈에 띄는 건 왜일까?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겠다. 그 백수녀석이 라면 안 끓여줬다고 삐졌나부다. 요즘은 쥐포도 안 시켜먹고 만화
책에만 열중하고 있다.
백수 : 그녀의 눈에 띄기 위해 목욕재개하고 옷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만화방에 갔다. 역시 예상대로
그녀가 날 쳐다보았다. 여자는 역시 외모에 약한가 부다. 이제 그녀의 눈에 띄는 건 시간문제다.
만화방아가씨 : 오늘은 그 백수가 오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녀석이 있었는데 너무 깔끔했다. 맨날 오
던 그녀석이 안보이니 허전했다. 다음에 라면 끓여 달래면 눈 딱깜고 하나 끓여줘야 겠다. 상당히 속
이 좁은 녀석인거 같은 느낌이 든다.
백수 : 오늘은 양복을 쫙 빼 입고 만화방에 갔다. 만화방안에 있던 녀석들까지 날 쳐다본다. 이 정도
면 확실히 그녀 눈에 띌게 틀림없다. 그녀가 자꾸 쳐다보았다. 다음에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자.
만화방아가씨 : 만화방에 왠 양복입고 온 놈이 있다. 무척 낯이 익은 얼굴이다. 만화방안에 있던 녀석
들이 조기 실업잔가부다 하고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 백수녀석이다.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거 같다. 잘 때 문단속 잘해야겠다.
백수 : 큰맘먹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볼려고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화책 뒤지는 척 그녀를 몰
래 쳐다보기만 했다. 나약한 내 모습이 싫었다. 계산할 때도 아무 말도 못하고 돈만 홱 던져주고 도망
치듯 나왔다.
만화방아가씨 : 그 백수가 만화책을 뒤적이며 날 쳐다본다. 오늘은 기필코 단서를 잡아내고 말 거다.
근데 녀석이 나갈 때 만 원 짜리 던져주고 거스름돈도 안 받고 나가버렸다. 내가 오해한 걸까..? 라면
사다 놓으라는 계시일까? 진짜 이상한 놈이다.
백수 : 오늘도 말을 걸지 못했다.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자꾸 만화책꽂이만 서성거리며 그녀를 훔쳐
보기만 했다.
만화방아가씨 : 그 백수녀석이 요즘 이상하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거 같다. 자꾸 만화책꽂이를
돌아다니기만 할뿐 책을 보지는 않는다. 무얼 찾는 거 같다.
만화방아가씨 : 그 백수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서야 알겠다. 성인 야한 만화책.. 난 그러구 싶지
않은데.. 단골을 잃지 않을려면 할 수 없다. 내일 당장 구해다 꽂아놓아야겠다.
백수 : 오늘 드디어 결심을 했다.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 앞으로 갔다. 그리고 "저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뻤다. 내가 고백하기를 기다린 건가..? 근데 내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손으로 어디를 가리켰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보았다. 엄
청 야한 성인만화가 많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이 책들을 재밌게 본 모양이다. 나도 재밌게 보라고 권
유하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많이 밝히는 여자 같다. 그녀의 순수한 이미지가 깨질려고 한다.
만화방아가씨 : 그가 드디어 말을 걸었다. 좀 쪽팔린가부다. 그럴 만두 하지.. 그가 원하는걸 이미 준비
해둔 나는 그가 더 이상 쪽팔리지 않게 하기 위해 손으로 그곳을 가리켜 주었다. 기쁜 표정으로 짤래
짤래 그곳으로 가는 그 백수 뒷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여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다.
백수 : 순수해 보이던 그녀가 매일 밤 혼자서 저런 야한 만화책을 쌕쌕거리면서 보는 거 같아 의심스
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어제도 저걸 밤이 깊도록 본 모양이다. 오전부터 졸고있다. 하지만 여전히 난
그녀를 좋아한다.
만화방아가씨 : 어제 밤 늦게까지 음악에 젖어 소박한 사랑이야기를 꿈꾸다 잠을 못 이루었다. 몹시
졸리다. 졸고 있는데 그 백수가 왔다. 그도 졸린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저런 눈은 왠지 음흉스럽
다. 집에는 잔뜩 음란잡지가 쌓여 있을 거 같다. 여전히 저 백수는 경계심을 일으키게 한다.
백수 : 그녀를 생각하며 시 한편 적었다. 애틋한 감정이 솟구친다. 밤에 그녀 만화방주위를 서성거려
보았다. 닫힌 만화방 창문사이로 작은 불빛이 비쳤다. 피곤한 하루를 접고 잠을 이루는 그녀만의 공간
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리라. 그녀는 오늘 무슨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하고 있을까..? 별빛 같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작은 불빛의 공간 안에서 오늘과의 작별을 아쉬
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 불빛을 뒤로하고 그녀를 생각하며 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만화방아가씨 : 변비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나같이 이쁜 숙녀한테 하늘이 시기하며 내린 벌 같다. 벌
써 한 시간째 화장실에 앉아 있다. 오늘은 꼭 성공하리라 다짐하지만 여간 힘이 쓰이는 게 아니다. 찡
그린 얼굴 때문에 주름살이 생길까 걱정이 된다.
백수 : 그녀가 오늘은 왠지 헬쓱해 보였다. 무슨 고민이 있는 거 같다. 용기를 내어 힘내세요란 말을
남기고 만화방을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멋있는 말을 남긴 거 같다.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할
텐데...
만화방아가씨 : 그녀석이 어제 변비 땜에 고생한걸 어떻게 알았을까..? 귀신같은 놈이다. "힘내세요."
분명 날 놀린 말이 틀림없다. 그가 요즘 좀 좋아질려고 했는데, 나의 아픈 곳을 그렇게 매정하게 긁고
가다니.. 원수 같은 놈..
백수 : 만화방에서 오늘 일곱 개의 숟가락이란 만화를 보았다. 슬프고 진한 감동이 왔다. 세 권을 읽
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고개를 들고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쪽팔렸
다. 사내자식이 만화책보며 운다고 놀릴 것 같다. 부끄러워 고개도 못 들고 계산을 하고 바로 나와버
렸다. 다음부터 그녀 대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다.
만화방아가씨: 오늘 그 백수가 만화책을 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꽤 슬픈 만환가 보다. 그 녀석은 나갈
때까지 그 책의 여운이 남았는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오늘밤에 그 만화책을 보며 나도 울었다. 그 백
수자식 생각보다는 여린 면이 있다. 그 녀석 얼굴이 떠올라 괜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백수 : 오늘 잘못했다간 맞아 죽을뻔 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걸까? 그녀 만화방에서 불량고교생
두 명이 행패를 부렸다. 한 권 값으로 한 열 권을 본 모양이다. 그녀가 그걸 눈치채고서 돈을 더 내라
고 하다가 싸움이 붙었다. 에그 자식들 나처럼 능숙한 자도 세 권 이상은 안 했는데.. 무모한 놈들이
다. 하여간 주인이 여자니까 이것들이 엄청 날뛰었다. 나두 겁이 졸라 많이 났다. 만화책을 덮고 집으
로 갈려고 했는데 .. 이것들이 그녀를 툭툭 친다. 순간 나도 모르게 툭툭 치던 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다른 한 녀석을 겁나게 째려보았다. 그 자식이 "머 머야. 이 새끼.. 니가 먼데 끼드는데..."라고
말했다. 나이도 어린 게 반말을 썼다. 기분이 엄청 더러웠다. 보통 영화나 연속극의 이런 상황에서 나
이 여자 남편이다. 또는 약혼자다 그러는 걸 본적이 있어서 나두 그렇게 말할려구 했는데 거기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나 백수다" 라고 말해버렸다. 아까 맞은 녀석까지 정신을 차리더니 웃었다.
그 자식들 아주 악날한 놈들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덩치가 좀 있고 인상이 더러버 보였는지 그냥 있
는 돈이 이거뿐이라며 내고 가버렸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는걸 느꼈다. 그녀는 자기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뭔가 위로의 말은 해 주어야겠는데. 할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본 만화책값을 살며시 놔두고 그냥 나왔다. 그녀는 내가 백수라고 말한걸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다음
부터 어떻게 그녀 얼굴을 보나..?
만화방아가씨 : 오늘 큰 낭패볼 뻔 했다. 어떤 고딩 둘이서 돈도 안내고 만화책을 자꾸 바꿔 보았다.
어떻게 한 권 값으로 열 권이나 보냐.. 몹시 열 받았다. 그래서 돈 내라고 했더니 툭툭 치며 날뛰었다.
괜히 싸움걸었나 싶었다. 겁도 났다. 눈물이 날려는 걸 꾹 참았다. 근데 그 백수녀석이 나타나 한 녀석
을 한방에 때려눕히더니 다른 녀석을 겁나게 째려보았다. 멋있었다. 근데 그 상황에서 나 백수다라고
그러다니 갑자기 너무 웃음이 나왔다. 애써 날 도와주었는데 웃고 있으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
았다. 그래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혹시 말을 걸면 운 것처럼 보이기 위해 침으로 눈에다 찍어
발랐다. 그런데 그냥 나가버렸다. 오늘 잠자리에 드는데 날 도와준 그가 자꾸 눈에 어린다. 내일 그가
오면 고맙다고 말하고 라면하나 끓여 주어야겠다.
백수 : 내가 백수인 게 탄로 났다. 그녀 만화방에 갈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 먹
고 잠이나 자야겠다. 라면을 먹는데 귀가 엄청 간지러웠다. 아무래도 라면에 이상이 있는 거 같다.
만화방아가씨 : 어제 도와준 게 너무 고마와 그를 위해 아침에 시장에서 생라면 사리와 표고버섯 시
금치 등을 사 가지고 왔다. 육수도 만들어 그가 오면 바로 끓여서 줄 것이다. 방부제 든 제품라면으로
는 이렇게 진하고 여운이 남는 맛을 내기 어렵고 정성도 결여된 것이기에.. 오늘 좀 신경을 썼다. 근데
이 녀석이 나타나지 않았다. 닳아져 가는 육수를 보며 그 녀석 욕을 엄청 했다. 좋아질려고 하면 꼭
딴 쪽으로 샌다.
백수 : 오늘 컵라면 하나 사 가지고 만화방에 갔다. 어짜피 백수라고 알려진 것. 더 이상 쪽팔릴 것두
없다. 그녀가 오늘따라 화사하다. 용기를 내어 "아..아... 아줌마 뜨거운 물 좀 주세요.."라고 말했다.. 으
이그... 아가씨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녀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을 부어주었다. 근데 라면 맛
이 이상하다. 상한 거 같다. 이상한 고기 비린 맛이 났다. 아까웠지만 화장실에 부어버렸다.
만화방아가씨 : 그가 컵라면을 가지고 만화방에 왔다. 라면 개시하라는 무언의 시위 같다. 그가 또 아
줌마라 그랬다. 엄청 얄미웠지만 그때 도와준 일도 있고 해서 인심을 써 육수를 부어주었다. 근데 녀
석이 라면을 먹다말고 화장실로 간다. 먹으면서도 쌀 수가 있다니 부러운 놈이다.
백수 : 오늘 만화방에서 더럽게 생긴 두 녀석을 보았다. 한 녀석은 노란 추리닝에 피시에스를 낀 놈이
고 한 녀석은 짝이 안맞는 딸딸이를 신고 있었다. 저 녀석들 부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도 그녀는 고혹한 모습으로 계산대에 앉아 졸고 있다. 사랑스럽다.
만화방아가씨 : 백수 그 녀석 말고 눈에 띠는 녀석이 둘이 들어왔다. 내가 만화방 차린 게 후회된다.
저것들도 단골이 될까봐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노란 추리닝 녀석이 나보고 아줌마라 그랬다. 딸딸이
녀석은 라면을 시켰다. 죽고싶다. 계산하고 나갈 때 딸딸이 녀석이 동전을 한 움큼 내놓고 갔다. 애들
콧물이 묻어 있는 거 같은 느낌이 왔다. 추리닝 녀석은 피시에스를 꺼내더니.. " 내가 말이야 만화방으
로 자리를 옮겼어.."라는 이상한 말을 지껄이더니 마지막에 "아줌마 이거 피시에스에요"라는 말을 던지
고 나갔다. 왠지 지구인이 아닌 거 같았다. 백수 그 녀석이 오늘따라 멋있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딸딸이(특별출연) : 만화방 여주인이 이뻤다. 이 백수친구만 안 데리고 왔어도. 여기를 단골로 다닐텐
데.. 저 녀석 땜에 쪽을 다 팔았다. 짝재기 딸딸이도 왠지 맘에 걸린다. 라면을 시켰는데 주인 아가씨
가 아무 반응이 없다. 아마 이 녀석이 아줌마라 불러서 화가 났나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곤 짤
짤이해서 딴 동전들 뿐이다. 나갈 때 좀 쪽팔리겠다.
노란 추리닝(특별출연) : 졸라 야한 만화책이 많다. 재밌다. 주인 아줌마한테 피시에스 자랑이 하고 싶
다. 나갈 때 자랑하고 나가야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