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矢)처럼 곧은 녀석도
나름의 이유야 있겠지만
한 마디 자라 고민하고
또 한 마디 자라 반성하면서
우듬지까지 올라야만
진정한 나무 아니겠나
(정동묵·시인)
+ 나는 나무입니다
나는 나무입니다
씩씩하고 건강한 나무입니다
부지런히 일하지만
자유로운 나무입니다
나는 언제나 정직합니다
내 도움을 받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나는 항상 기쁘고 만족합니다
여러분, 내게로 오십시오
나는 나무입니다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는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임경빈·시인)
+ 나무
나무는 사람이 아니다
귀가 없고 눈이 없는
나무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캄캄한 펌프질로 길어올리는
손도 팔도 다리도 없는
나무는 서서 생각하고
서서 잠자는 그늘인가 했다
때로 햇살을 흔드는 손짓 같기도 하고
내심을 감추고 서서 속으로 되새기는
웬 더딘 말씀인가 했다
(정병근·시인, 1962-)
+ 나무
나무는
한 자리에 서 있어도
잎으로 끝없는 바람의 노를 저어
푸른 입김을 대기에 가득 심는다.
나무는
기교의 손이 없어도
긴 여름 먼 일광(日光)의 끈들을 뽑아
생명의 주머니를 곱게 짠다.
그대 보고 듣고 움직이는
교만한 자여,
나무는
발도
눈도
귀도 없이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여기까지
이렇게 이미 와 있다.
(임보·시인, 1940-)
+ 초록 꽃나무
꽃 피던 짧은 날들은 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빛깔로
돌아와 있다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나무는 다시 똑같은 초록이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아도
꽃나무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된다
그렇게 함께 서서
비로소 여럿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고
마을 뒷산으로 이어져
숲을 이룬다
꽃 피던 날은 짧았지만
꽃 진 뒤의 날들은 오래도록
푸르고 깊다
(도종환·시인, 1954-)
+ 겨울 나무
꽃눈은 꽃의 자세로
잎눈은 잎의 자세로 손을 모으고
칼바람 추위 속에
온전히 저를 들이밀고 서 있네
나무는,
잠들면 안 된다고
눈감으면 죽는다고
바람이 둘러주는 회초리를 맞으며
낮게 읊조리네
두타頭陀*의 수도승이었을까
얼음 맺힌 눈마다 별을 담고서
나무는
높고 또
맑게
더 서늘하게는 눈뜨고 있네
(복효근·시인, 1962-)
* 두타(頭陀) :
산야를 떠돌면서 빌어먹고 노숙하며
온갖 쓰라림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음,
또는 그런 수행을 하는 중을 뜻한다
+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
향나무 웃자란 가지를 치는데
순식간에 벌이 장갑 낀 손가락을 쏜다
손가락이 쿡쿡 쑤시고
손등이 부어오르고 팔뚝까지 얼얼해진다
그러나 벌집이 숨어 있는 위험한 향나무를
나는 버릴 수 없다 떠날 수 없다
독이 오른 아픈 손으로
나는 다시 전지를 한다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불바다에 뛰어든 그
전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고
두 다리를 잃어버린 역무원
사랑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구나
목숨을 거는 것이구나
사랑 있어
캄캄한 세상도 희망이 되는구나
화끈화끈 쑤시는 내 손끝에서
벌집이 숨어 있는 위험한 향나무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차옥혜·시인, 1945-)
+ 나무를 생각함 - 손택수 형에게
나무는 제가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둥글게 첫 나이테를 말기 시작할 때부터
나무는 언제나
다가올 제 운명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제 몸에 명주실을 걸어
소리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어깨를 기대
집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제 살을 깎아
부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나무는
한평생 나무로만 살다가
어느 짧은 순간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나무는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이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잎사귀에 고이는
나지막한 봄비의 가르침만으로도
나무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최갑수·시인, 1973-)
+ 나무를 위한 예의
나무한테 찡그린 얼굴로 인사하지 마세요
나무한테 화낸 목소리로 말을 걸지 마세요
나무는 꾸중들을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는 화낼만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네 가족의 가훈은 <정직과 실천>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싹을 내밀고 꽃을 피우고 또 열매 맺어 가을을 맞고
겨울이면 옷을 벗어버린 채 서서 봄을 기다릴 따름이지요
나무의 집은 하늘이고 땅이에요
그건 나무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때부터의 기인 역사이지요
그 무엇도 욕심껏 가지는 일이 없고 모아두는 일도 없답니다
있는 것만큼 고마워하고 받은 만큼 덜어낼 줄 안답니다
나무한테 속상한 얼굴을 보여주지 마세요
나무한테 어두운 목소리로 투정하지 마세요
그건 나무한테 하는 예의가 아니랍니다
(나태주·시인, 1945-)
+ 절필 - 한라산 구상나무에 바침
끝끝내 저 나무는 색(色)에 들지 않는다
바람에 끝을 벼린 바늘잎 세필로는
격문(檄文)은 쓰지 않겠다 붓을 꺾은 고사목
뼈를 깎는 뉘우침이 골각체(骨角體)를 만든다
산세가 험할수록 더 명징한 산울림이
오히려 필화(筆禍)가 되어 눈 퍼붓는 한라산
세상에 맞서려면 저렇게 간결하라
살점은 다 버리고 흰 뼈만 내리꽂는
저 뻣센 반골의 획이 가슴팍에 박힌다
(이성목·시인, 1962-)
+ 나무
나무가 쑥쑥 키를 위로 올리는 것은
밝은 해를 닮고자 함이다.
그 향일성(向日性)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을 닮고자 함이다.
잎새마다 어리는
그 눈빛.
나무가 저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은
별들을 닮고자 함이다.
바람 불어 한 세상 흔들리는 날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견디는 그
따뜻한 가슴.
나무가 촉촉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것은
은핫물을 닮고자 함이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흘려 준
한 방울의 물
가신 우리 어머니가 그러하시듯
산으로 가는 길은 하늘 가는 길.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 마음. 하늘생각 가슴에 품고
먼 날을 가까이서 살기
때문이다.
(오세영·시인, 1942-)
+ 나무
어딘지 모를 그곳에
언젠가 심은 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다.
높은 곳을 지향해
두 팔을 벌린
아름다운 나무
사랑스런 나무
겸허한 나무
어느 날 저 하늘에
물결치다가
잎잎으로 외치는
가슴으로 서 있다가
때가 되면
다 버리고
나이테를
세월의 언어를
안으로 안으로 새겨 넣는
나무
그렇게 자라 가는 나무이고 싶다.
나도 의연한 나무가 되고 싶다.
(김후란·시인,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