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에 관한 시 모음> 강인호의 '구멍' 외 + 구멍 집 없는 새에게 방이라도 한 칸 내어주려는 것인지 나이든 상수리나무 제 몸에 구멍 하나 크게 뚫었습니다 (강인호·시인) + 할머니는 바늘구멍으로 할머니가 들여다보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잖는데 할머니 눈에는 다 보이나 보다. 어둠 속에서도 실 끝을 곧게 세우고는 바늘에 소리를 다는 할머니 손 밤에 보는 할머니의 손은 희다. 낮보다도 밝다. 할머니가 듣고 있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소문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잖는데 할머니 귀에는 다 들리나 보다. (윤수천·시인, 1942-) + 구멍 어느 날 그릇의 손잡이가 떨어져나갔다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자리 우연한 구멍 하나 그릇 바깥에서 보는 구멍은 새의 발자국 하나, 바람의 손바닥 하나 앉힐 수 없는 구멍으로 구멍인 그저 작은 구멍이겠지만 그릇의 안쪽에서 보는 구멍은 하늘물길 다 퍼 담을 수 있는 구멍 아닌 구멍인 커다란 구멍이다 그 구멍이 혀 밑에 감추어둔 말의 적막이고 적막의 카페 열린 방이고 그 구멍이 바로 새의 길이다 (강초선·시인, 1955-) + 구멍에 집어넣는 일들은 행복하다 구멍에 집어넣는 일들은 행복하다 내가 가진 사이즈를 알맞은 구멍에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구멍과 알맹이가 함께 가슴 비비며 세상의 험한 돌계단을 오를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구멍에 들어가는 일들은 아름답다 큰 구멍일수록 몸을 더 키우고 아주 작은 구멍도 깎고 다듬어 알맞은 크기로 같은 살이 된다는 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세상의 숱한 구멍들 메우지 못해 뻥뻥 뚫린 구멍들이 보인다 삶의 모퉁이를 삐죽이 나온 상처 하나가 제 구멍을 찾아 돌아다닌다 맞지 않은 구멍 속에서 이리 쑤시고 저리 뒹굴며 또 하나의 큰 구멍을 뚫고 있었다 (김시탁·시인, 1963-) + 다른 구멍에 넣다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는데 구멍이 카드를 밀어낸다 자꾸 넣어도 자꾸 밀어낸다 구멍이 자기를 밀어낸다는 걸 알았는지 구멍이 밀어내기도 전에 카드가 먼저 비집고 나온다 몇 번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 줄 선 아주머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차 누가 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을까 현금 카드를 넣는다는 게 전화카드를 넣어버렸다 아주머니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최영철·시인, 1956년 창녕 출생) + 비둘기는 구명을 좋아한다. 창공을 멀리 날지 않는 비둘기는 구멍을 좋아한다 수시로 드나들며 캄캄한 동굴 속 홀로 앉아 노래한다 아침거리에 내려앉아 먹이를 쪼고 저녁 하늘을 배회하다 돌아와 구멍 속으로 한 발 들여놓을 때 발목을 나꿔채는 차가운 손 예기치 않은 시련과도 만나고 있다 죽을힘으로 파닥거려 보지만 몰려오는 거대한 잠 속으로 이내 빠져들고 모가지를 움츠리고 새벽이 올 때까지 잠이 든다 무기력하게 도시의 도처에 숨어 있는 구멍은 가만히 있어도 부드러운 깃털과 따뜻한 체온으로 스며드는 비둘기가 좋아 비둘기를 키우지만 비둘기는 구멍이 안 좋아도 돌아온다 창공에는 앉을 자리가 없으므로 발목을 잡히며 멀리 날지 않는다 (강영환·시인, 1951-) + 구멍 얼마나 많은 손들이 들락거렸던가 (결국 늙은 염쟁이까지 끌어들이는군) 생선 썩는 냄새도 피고름도 말라버린 정액도 그 언덕에선 이제 고즈넉하고 억새인가 갈대겠지 대여섯 올 성긴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적막만이 폐허가 그 주인인 어머니, 제가 정말 그곳에서 나오긴 나왔나요 (유용주·시인, 1960-) + 열쇠구멍 뚫고 들어온 석양 닦아도 닦아도 닦아지지 않는 물방울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 공부방 컴컴한 바닥에 하얀 물방울이 하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화이트 쓰다가 간혹 떨구는 일도 있어서 별 생각 없이 그냥 휴지로 닦았습니다. 그러나 닦아지지 않았습니다. 수건에 침을 묻혀 또 닦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닦아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물걸레 가져다가 가루 비누 뿌리고 닦고 또 닦았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말간 타원형 물방울은 오히려 더 선명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선배 한 분 생각이 났습니다. 손등의 白斑 없애려고 독한 피부약 마구 복용하다가 저 세상 일찍 간 그분 생각이 나서 물걸레 멈추고 가만히 다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그것은 물감이 아니라 열쇠구멍 뚫고 들어온 귀한 손님이 아니겠습니까 수십 光年 날아와, 저의 서쪽 창문 뚫고 다시 안의 도아, 열쇠구멍 뚫고 기어코 찾아 들어온 저의 귀한 손님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때 그 놀라움이란! 저는 그날 그 물방울과 그 물방울의 源泉 사이에 놓인 무한 저수지에 저의 착각을 헹구고 또 헹구며 오래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왜 빛이 물방울로 보였을까요.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착각이 오랫동안 저를 잡고 있었을까요.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착각이 아닙니다. 요즘은 빛이 물방울이란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입니다. 물방울이 빛인 것처럼. (김동호·시인, 1934-) + 구멍에 대하여 구멍이란 말을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시원해진다 공연히 신이 난다 신바람이 인다 여자가 사내보다 하나가 더 많다는 말도 괜스레 짜릿짜릿하게 하지만 똥을 쏘는 일이나 오줌을 싸는 일이 얼마나 통쾌한가 모든 생명은 구멍으로 존재한다 구멍에서 왔다가 구멍으로 돌아간다 식물도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동물은 또 안 그런가 우리 마음에 구멍이 없다면 모두 미친놈이 되고 만다 히히히 미친년이 되고 만다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구멍을 보라 그러나 세상에 비어 있는 구멍은 없다 가락지는 구멍이 있어 발딱발딱 숨을 쉬고 당신과 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순간과 영원을 이어주는 약속이 된다 가장 완벽한 구멍이면서 무시당하는 0이라는 숫자의 당당한 존재를 보면 모든 숫자가 무색해질 뿐이다 모든 것을 품어 안고 소유하지 않는가 사형수를 기다리고 있는 올가미의 진실은 만 가지의 화환보다도 화려하다 금반지 보석팔찌보다도 순수하다 천체망원경 속의 광대무변한 우주도 하나의 구멍이다 실로 모든 존재가 구멍 속에서 꽃피지 않는가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구멍이 있을 뿐 구멍은 발견이요 인식이다 아름다운 자궁이다 구멍은 소리의 집이요 입이요 눈이요 코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그 안에 살아 화살을 날린다 화살은 왜 나는가 영원이란 구멍 죽음이란 구멍 삶이란 구멍 아픔이란 구멍 설움이란 구멍 사랑이란 구멍 순간이란 구멍 --- 그 구멍의 구멍을 찾기 위하여. (홍해리·시인, 194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