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에 관한 시 모음> 강진규의 '가을 하늘 아래 서면' 외 + 가을 하늘 아래 서면 가을 하늘 아래 서면 화살처럼 꽂히는 햇살에 맞아 늘 아프고 부끄럽더라 얼마쯤 잊어버린 죄책감을 꺼내어 맑은 물에 새로이 헹궈 깃대 끝 제일 높이 매달고 싶더라 크신 분의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괜찮다 괜찮다고 속삭일 때까지 밤새워 참회록을 쓰고 싶더라 (강진규·시인, 서울 출생) + 가을 하늘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욱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 보고 싶은, 푸웅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머언, 먼 가을 하늘. (윤이현·아동문학가) + 가을 하늘 연못에 가을 하늘이 파랗게 빠져 있다. 두 손으로 건져내려고 살며시 떠올리면 미꾸라지 빠지듯 조르르 손가락 새로 쏟아지는 가을 하늘 (최만조·아동문학가) + 가을 하늘 높기도 하려니와 푸름은 쪽빛 같고 넓기도 하거니와 맑기는 명경明鏡일세 가을 하늘 우러러보며 지순至純함을 배우네 (오정방·시인, 1941-) * 명경: 맑은 거울. + 가을 하늘 울타리 밑에서 호박은 핑크빛으로 늙어갔다 마른 넝쿨손이 울타리목을 잡은 게 필사적이었다 은행잎이 노라니 익어가는 언덕길 끝은 푸르디 높은 하늘 어디서, 쩡쩌엉쩡, 대낮의 장끼가 울어댔다 하루가 소리 없이 빨리도 지나가지만 다가오는 먼 그림 속 빛깔들이 바람 속에서 다투어가고 있었다 (구재기·시인, 1950-) + 가을 하늘 누구의 시린 눈물이 넘쳐 저리도 시퍼렇게 물들였을까 끝없이 펼쳐진 바다엔 작은 섬 하나 떠 있지 않고 제 몸 부서뜨리며 울어대는 파도도 없다 바람도 잔물결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고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 끝에 머물며 제 몸만 흔들고 있다 (목필균·시인) + 시월하늘 철새 돌아오는 때를 알아 누가 하늘 대문을 열어 놓았나. 태풍에 허리를 다친 풀잎들은 시든 채 오솔길을 걷고 황홀했던 구름의 흰 궁전도 하나둘 스러져 간 강변 시월하늘 눈이 시리도록 너무 높고 맑고 푸르러 어디에 하늘 한 만 평쯤 장만할 수 있을지 주민등록증하고 인감도장을 챙겨 들고 나가 봐야겠다 (김석규·시인, 1941-) + 가을 하늘 나도 모르는 사이 탱자 한 알이 주머니로 들어왔다 며칠간이나 꿈자리에서 뒤척였을까 내 몸 어딘가에도 자궁이 있는지 꿈틀꿈틀 하늘이 부화하고 있다 하늘의 눈은 막막한 울음인 듯 멀고도 깊다 그만, 자진自盡하고 싶다 오, 하느님! (김영준·시인, 193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