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시 모음> 정동묵의 '꼭 가야 하는 길' 외 + 꼭 가야 하는 길 걸어가지 못하는 길을 나는 물이 되어 간다. 흐르지 못하는 길을 나는 새벽안개로 간다. 넘나들지 못하는 그 길을 나는 초록으로 간다. 막혀도, 막혀도 그래도 나는 간다. 혼이 되어 세월이 되어 (정동묵·시인) + 아직 가지 않은 길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 천리 만리였건만 그 동안 걸어온 길보다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행여 날 저물어 하룻밤 잠든 짐승으로 새우고 나면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그 동안의 친구였던 외로움일지라도 어찌 그것이 외로움뿐이었으랴 그것이야말로 세상이었고 아직 가지 않은 길 그것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 바람이 분다. (고은·시인, 1933-) + 불멸의 길 아홉 살 딸과 눈 맞추고 열다섯 아들과 머리 맞대고 꾸준히 거침없이 앞만 보면서 당당하고 경쾌하게 걸어가기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길 산과 산 사이에 들과 들 사이에 길은 있다 강을 가로질러 이쪽과 저쪽에 길은 있다 길은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고 길은 누워서 게으르지 않다 길은 가로수와 패랭이꽃을 키우고 인간을 키운다 산모롱이를 돌아 평화를 전한다 길은 뻗어서 멈추지 않고 나뉘어져 막히는 법이 없다 뻗고 나뉘어져 사랑으로 이 세상을 이룬다 쓸쓸한 시대의 새벽길을 걸으며 문득 나도 한 줄기 길이 되고 싶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고운 실핏줄로 눕고 싶다 (변준석·시인, 1962-) + 길 나의 길은 발을 여이고 배로 기어간다 五月의 가시밭을. 너의 길은 빵을 잃고, 마른 혀로 입맞춘다 七月의 황톳길을. 그대의 길은 사랑을 잃고, 꿈으로만 떠오른다 十月의 푸른 하늘을. 우리의 길은 머리를 잃고, 가는 꼬리를 휘저으며 간다 山河에 머흘한 구름 속으로. (김현승·시인, 1913-1975) + 길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들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안에서 밖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경림·시인, 1936-) + 오솔길을 걸을 땐 상상임신을 한다 오솔길을 걸을 땐 활처럼 둥그렇게 휘어진 길에 계획과 목표와 시행착오 산아래 것들을 잠시 내려놓으면 오른편 관자놀이를 쪼던 편두통이 왼편 관자놀이 밖으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풀벌레소리 이슬 떨어지는 소리 나무 잎사귀에 입술을 달아주려고 능선을 넘어오는 바람소리가 비어있는 머리통에 담긴다 담기면서 그것들은 베 짜는 소리 촛농 떨어지는 소리 할아버지 두루마기자락 쓸리는 소리를 낸다 오솔길에 안기면 옛집이 잘도 들어선다 그런 날에는, 두고 온 자두나무가 자꾸만 궁금해지는 것이다 (원무현·시인, 1963-) + 산길 산길은 산을 닮아 있다. 산을 닮은 산길은 산을 배반하지 않는다. 산이 둥글면 둥글게 길을 열고 산이 각지면 각지게 길을 열고 산의 높이만큼 산의 깊이만큼 오르내리면서 산과 함께 하고 산길은 나무를 사랑할 줄 안다.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나무들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비어 있는 곳으로 다니고 산길은 사람을 알아본다. 사람을 알아보기에 사람을 대할 줄 안다 성질 급한 사람은 급하게 걷다 지치게 만들어 천천히 가게 하고 차분한 사람은 차분하게 걷다 산 깊은 맛을 보게 하고 사람에 맞게 길을 가게 하고 산길은 산을 닮아서 좋고 산길은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서 좋고 산길은 사람을 알아봐서 좋고 그래서 산길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 (이대의·시인, 1960-) + 인생의 길 인생의 길은 산행(山行) 같은 것 가파른 오르막 다음에는 편안한 내리막이 있고 오르막의 길이 길면 내리막의 길도 덩달아 길어진다 그래서 인생은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것 완전한 행복이나 완전한 불행은 세상에 없는 것 살아가는 일이 괴롭고 슬픈 날에는 인생의 오르막을 걷고 있다고 마음 편히 생각하라 머잖아 그 오르막의 끝에 기쁨과 행복의 길이 있음을 기억하라 내가 나를 위로하며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인생의 길은 그래서 알록달록 총천연색 길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 고달파도 고마운 길이여 오! 너와 나의 인생의 길이여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