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시 모음> 윤동주의 '어느 날 오후 풍경' 외 + 어느 날 오후 풍경 창가에 햇살이 깊숙이 파고드는 오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구름 한 점 그림처럼 떠 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살아가면 갈수록 손에 잡히는 것보다 놓아주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한가로운 오후 마음의 여유로움보다 삶을 살아온 만큼 외로움이 몰려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윤동주·시인, 1917-1945) + 산이 있는 풍경 산을 내려갈 때에는 언제나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 뻣뻣하게 세우고 내려갈 수는 없다 고개도 숙여야 한다 고개를 세운 채 내려갈 수는 없다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고 위를 쳐다보면 아, 하늘은 높고 푸르구나 이것이다 산이 보여주려는 것 하늘은 무척 높다는 것 푸르다는 것 사람보다 훨씬 크다는 것 이것을 보여주려고 산은 날마다 손을 내밀어 오라 오라 했나보다 (윤수천·시인, 1942-) + 풍경 한 점 물 위에 점점이 저 흰 꽃들 왜가리 서너 마리 한여름 땡볕을 한 입씩 베어 물고 사뿐 물 위에 내려앉으니 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밭 물결 사이사이 하얀 꽃잎이여 꽃잎 같은 새여 내 마음속 그늘의 벽에 오래오래 걸어 둘 풍경화 한 점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 시골집 풍경 물보라 일으키며 세차게 비가 내린다 흙 마당 한 가득 된장국 같은 빗물이 고이고 물방울들 뽀글뽀글 피어올라 병아리떼처럼 재잘거리더니 하나씩 하나씩 줄 서서 차례로 마당을 떠난다 바다 찾아 먼 길 간다 (신석종·시인, 1958-) + 노점 풍경 단속반 호루라기 태풍이 지나간다. 과일들이 발길에 채여 한길에 구른다. 아프다 엄살을 부리며 떼굴떼굴 구른다. (김시종·시인, 1942-) + 풍경화 속으로 들어가다 창밖에 가랑비 내리는데 거실 벽에 있는 풍경화를 보고 있었네 그림 속 오솔길 내게로 다가왔네 나는 고개 숙여 걸어 들어갔네 잣나무 떡갈나무 자작나무들 향기로 다가오고 나리 더덕 산마 어린 새싹 나를 반겼네 멀리 만년설 까마득한 산이 서 있고 계곡 물소리 들으며 숲 눈뜨면 문 열리고 진달래꽃 머리에 꽂은 작은 소녀 나풀나풀 걸어나와 왜 이제 왔느냐고 울먹였네 그녀는 먼 옛날의 소꿉친구 진달래꽃 숲으로 사라져버린 내 가슴의 아픈 멍울이었네 (김종익·시인) + 아름다운 풍경 작은 불씨를 모아가며 사랑을 이루었으니 마지막까지 불꽃으로 타올라야 한다 막 피어오르는 꽃망울로 만나 사랑을 꽃피웠으니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어느 날인가 불어온 바람으로 만났으니 구름을 불러 한바탕 쏟아져 내리는 비처럼 후회 없는 사랑을 해야 한다 작은 가슴을 태워가며 사랑을 했으니 후회 없는 웃음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너와 내 가슴에 사랑의 흔적이 언제나 남아 있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가며 사랑을 해야 한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풍덩! 어떤 풍경에 발목을 헛디딘 아침 수서성당 마리아상 앞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이봐, 젊은이. 이 나무 뻥 차주면 고맙겠구먼." 돌아보니 처음 보는 할머니였다. 느닷없는 부탁에 경로사상이 투철한 나는 발길질을 했다. 나무가 휘청거리며 쏟아내는 유쾌 발랄 까르르르르 황금빛 놀라운 음표들의 불시착! "젊은이, 세 번만 더 차주면 고맙겠구먼." 나는 또 찼다. 마술에 걸렸다. 짜릿한 경로사상이여! "더 세게. 더 세게! 젖 먹던 힘까지!" 굽은 허리의 할머니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은행털이범 젖 먹던 힘으로 아침 7시 10분 출근길, 헉! 우리는 얼마나 느닷없이 풍덩! 어떤 풍경에 발목을 헛딛는 것일까! (장인수·교사 시인, 1968-) + 막차가 끊긴 풍경 막차를 놓친 사람들로 터미널 불빛은 썰렁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외투 깃을 올려 세운 채 움츠린 발걸음으로 대합실 출구를 빠져나가고 가게문을 닫는 상점의 셔터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낙엽처럼 떨어졌다. 죽은 가랑잎 하나가 무심한 발길에 채여 캄캄한 바람 위에 누워 있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은 한마디 위로의 말도 없이 어둠 속으로 급히 뛰어들고 있었다. 막차를 놓친 사람들은 밤거리가 유혹하는 낯선 불빛을 따라 하나 둘 네온 속으로 숨어들고, 잃어버린 막차가 다시 따스한 불빛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밤의 숲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전성규·시인, 강원도 평창 출생) + 가을날의 풍경 산들바람에 연지 곤지 화장을 한 잎새들 수줍은 듯 하늘하늘 춤추고 하늘에는 조가비 껍질 닮은 구름이 해변처럼 펼쳐지고 따스한 햇살 살며시 다가와 은빛으로 부서지는 창문 너머 저 야트막한 산은 평화로이 오수(午睡)를 즐기는데 가만히 눈감으면 두둥실 떠오르는 한 사람 오! 당신의 얼굴 (정연복·시인, 1957-) + 사랑이 있는 풍경 행복한 사랑과 슬픈 사랑 참으로 대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이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사랑만이 가질 수 있는 기적이다. 행복하지만 슬픈 사랑 혹은 슬프지만 행복한 사랑이 만들어 가는 풍경은 너무 아름답다. 사랑이란 내가 베푸는 만큼 되돌려 받는 것이다.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주었지만 그 대가로 아무것도 되돌려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원망하거나 후회할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사랑은 나로 인해 완성된다. (생떽쥐베리·프랑스 비행사이며 작가, 1900-194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