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마종기·시인, 1939-)
+ 가을의 말
하늘의 흰 구름이
나에게 말했다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어느 날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가을 뜨락의 석류가
나에게 말했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마라
잘 익어서 터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면
어느 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물로 그린 그림
누가 나에게 우리나라 가을을 실제 크기로 그리라고 한다면
나는 항아리에 물을 붓고 기다리겠습니다
저 푸른 하늘이 다 잠길 때까지
(유재영·시인, 1948-)
+ 감
이 맑은 가을 날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허영자·시인, 1938-)
+ 복
가을 하늘은
슈퍼 튀밥 기계다
수수 알도 터지고
콩팥도 터지고
행길가 은행잎도 우수수 터진다
벼논의 깜부기도
까맣게 터졌다
헛간 지붕 위로
둥그렇게 터지는 박,
우리 엄니
복 터져 난리 났다
(강명미·시인)
+ 변절기
나무는 이제
완연한 가을빛이다
여름 내내 뜨겁게 지켜온
푸른 서슬 잃어버리고
온통 노오랗게 물이 들었다
세상에,
변절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가을빛 물든 거리가 눈부시네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엔
나도 그만
나를 배반해도 되겠다
(강승남·시인, 1958-)
+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아니면
혼자서 하염없이 길 위를 걸을 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단풍잎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
가을에는 정말
스쳐가는 사람도 기다리고 싶어라
가까이 있어도 아득하기만 한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미워하던 것들도 그리워지는
가을엔 모든 것 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희덕·시인, 1966-)
+ 가을이 오면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벌에게 주고
그래도 난 잃은 게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강용석·시인)
+ 가을
고독이란 위스키를 들고 온 친구
한 잔을 먼저 건네주고는
취기가 깨기 전 돌아가 버리는
예의 바른 나그네
가을을 읊으려 할 때쯤이면
벌써 창밖엔 흰 눈이 내린다
취하지 않은 눈으로 가을을 보고
사냥꾼처럼 그 영상을 잡고 싶지만
가을은
가슴을 휘젓고 떠나버린 사람 같아서
가을엔 가을을 말할 수 없다
(신명옥·시인, 1962-)
+ 멀리서 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나태주·시인, 1945-)
+ 가을 나비
여름이 제 한 살림 거두어 떠나려다가 호박의 무게에 치마가 눌려 주저앉는다
잠자리들이 산을 떠메고 가려고 떼 지어 몰리다가 제 그림자에 놀란다
옥수수 잎 서걱이는 소리 뒤로 가을 나비가 날아왔다
아, 저 나비
서리가 드리는 결별 뒤에서 저리도 천천히 떠날 수 있다니
떠남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모든 부재를 부르는 존재들의 이마가 저토록 오래 눈부실 수 있다니
(이기철·시인,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