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룰 수 없는 꿈은 아름답다
팔을 뻗고 발을 구르는
이 목마름은 아름답다
뜬눈으로 밤을 건너거나
입술을 깨물며 돌아서도
가눌 수 없는 이 눈물은 아름답다.
저만큼 가고 있는 네 등뒤에
눈길을 주며, 강의 이쪽에서
돌이 되는 가슴은 아름답다.
지워도 지워도 되살아나는
아픔과 상처, 강의 저쪽과
이쪽, 그 사이의 하늘에 번지는
절망의 빛깔은 아름답다
(이태수·시인, 1947-)
+ 절망
시인의 절망은 아름다워 시를 짓고
화가의 절망은 명화를 남기고
음악가의 절망은 명곡을 만드는데
사람의 절망은 힘겨운 싸움
눈물도 없고 빛도 없고
친구도 떠나고 마음조차 힘을 잃어
놓아 버리면 비로소 흙 향기 맡아
고향을 그린다
어머니를 그린다
진실을 가꾸는 농군이 된다
(송정숙·시인)
+ 절망
절망은
술 취한 목수
내 가슴에 망치질한다
박을 자리가 없는데도
대못을 박는다
나는 비명을 지른다
"아야! 아야- 아야- 아야- 아야......".
그러나 갑자기 커졌다가
점점 속으로만 기어드는
그 소리.
(신혜림·시인, 서울 출생)
+ 절망이란
절망이란
마음을 오도가도 못하게 옭아매서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밀어넣으며
한없는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절망이란
정신을 마비시켜
눈물 없는 눈물을 한없이 쏟아내게 하며
가슴이 답답해 숨을 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망이란
나를 겸손히 돌아보게 하여
무에서 새로운 유를 꿈꾸게 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한다
절망이란
별과 달이 새롭게 보여지게 되는 것이며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고
겸허하게 해 준다
(박인혜·시인, 1961-)
+ 절망 속에서 피는 꽃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백나무도
삶의 의지만 충만하다면 꽃을 피울 수 있다
진달래가 깎아지른 듯한 언덕배기에서
토사와 싸우며 무던히 버티려는 혼만 있다면
뿌리를 내릴 수 있고 만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아픔의 응축이
성숙의 개안을 가져다주듯
슬픔의 압축이
강인한 정신력을 선사하듯
고꾸라지고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고개 쳐드는 싹이
더욱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은
어떤 조건과 환경에도
버팅기는 기력이 있기에
희망의 꽃봉오리를 한아름 안고
무장무장 다가온다
절벽의 동백나무도
언덕배기의 진달래도
의지와 영혼이 살아있는 한
꽃을 흐드러지게 피울 수 있다
(반기룡·시인, 1961-)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온다 입모아 휘파람 불며
주머니 가득 설움덩이 쑤셔넣은 채
빌딩 옆 가로등 뒤에서
가로등 뒤 철문 옆에서
절망은 불현듯
그대 가슴으로 온다 떼를 지어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허리춤 가득 눈물덩어리 찔러넣은 채
눈빛 부드러이 절망은
별안간 그대 심장으로
온다 금빛 내일을 깔고 앉아
간혹 슬픈 낯빛으로 울먹이기도 하면서
전철역 지하광장에서
지하광장 신문판매대에서
절망은 콧노래를 부르며
온다 사람들 눈길을 피해
봄비는 발길을 피해
그대 여린 손목에
은빛 수정을 채우기도 하면서
온다 우쭐우쭐 어깨짓하며
투구를 쓰고 일렬횡대로
절망이여 잠시 너희 이 날들이여
그렇구나 오늘은 이미
네가 이 세상 절대권력이로구나
(이은봉·시인, 1954-)
+ 만성적 절망
아주 오래된 절망이었을 것이다
이게 무어람, 이게 무어람
알 수 없었던 명치 끝 돌멩이
너를 만나고 온 밤마다
막막한 석회질은 쌓여갔으리
그리고 오늘 드디어는 결정되었다
우리 사이의 병명이……
만성적 절망이라는 말이 걸어나와
우리 사이를 재빨리 결정해 버렸다
이 병을 이겨내는 길은
뒤돌아서서 뛰어가면 되는 것
"우리"라는 헛꿈을 깨면
우리의 병도 사라질 것 아닌가
뒷다리를 질질 끌면서
서럽게 우는 시늉도 하면서
저 찔레덤불 숲으로 사라질 것 아닌가
아무리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도
희망이 될 수 없는 우리가 낳은 절망,
나 혼자 갈아엎는 좋은 예식 앞두고
벼랑 앞에서 목소리 다듬는 중에
줄줄 울고 있는 주책없는 추억…
저 찔레덤불에 확 끼쳐가는 잠깐의 몸부림을
한심하도록 길게 끄는 교활한 추억.
(한영옥·시인,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