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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시 모음> 정연복의 '서울막걸리' 외

     날짜 : 2014년 07월 17일 (목) 5:15:28 오후     조회 : 2123      


<술 시 모음> 정연복의 '서울막걸리' 외

+ 서울막걸리

홀로 마시는
막걸리도 내게는
과분한 행복이지만

벗과 함께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은
더욱 황홀한 기쁨이다

나를 내 동무 삼아
집에서 혼자 따라 마시는
서울막걸리는
왠지 쓸쓸한 우윳빛

하지만 벗과 눈빛 맞대고
서로의 잔에 수북히 부어주는
서울막걸리는
색깔부터 확 다르다

벗과 다정히 주고받는
투박한 술잔에 담긴
서울막걸리의 색깔은

남루한 분위기의
희뿌연 술집 조명 아래에서도
왜 그리도 눈부신지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뽀얀 살결 같다


+ 소주

나를 빼닮아 잠잠히
투명한 영혼의 그대여

삶이 즐겁고 기쁠 때  
마음이 힘들고 외로움에 겨울 때면
얼마든지 나를 들이켜도 좋으리

언제든지 그대 가까이
그대의 호명(呼名) 기다리고 있나니

그대 천 원 짜리 낡은 지폐로
나를 찾아와서

동그랗게 이 몸 안아 주면
나 그대의 좋은 벗 되어주리

애오라지 하나
간절한 소원 있다면

내가 행여 그대의 몸에
몹쓸 독이 되지 않는 것

그대의 귀한 생명을 응원하는
맑고 순수한 기운이 되는 것

그래서 그대와 나의
생명의 빛깔이 서로 닮아가는 것


+ 술

어젯밤 이슥하도록
동무들과 진탕 퍼마신 술

앙금으로 남은 숙취로
온몸이 돌덩이 같다

조금만 절제하면 좋았을 것을....
늘 한발 뒤늦은 후회

술과 인연을 맺은 지도
삼십 년 세월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녀석의 정체를 도통 모르겠다

한순간 참 얄밉다가도
노을이 지면 살짝 그리워지는  

애증(愛憎)의 신비한 벗
술이여!


+ 인생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눈물 같은 소주를 마시며
잠시 슬픔과 벗할지언정  

긴 한숨은
토하지 않기로 하자

아롱아롱 꽃잎 지고서도
참 의연한 모습의

저 나무들의 잎새들처럼
푸른빛 마음으로 살기로 하자

세월은
훠이훠이 잘도 흘러

저 잎새들도
머잖아 낙엽인 것을


+ 가벼운 슬픔

이틀이나 사흘 걸러
늦은 밤 막걸리를 마십니다

뽕짝 테이프를 들으며
쉬엄쉬엄 마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빛 술병에 담긴

750밀리리터 서울 막걸리
한 병이 동날 무렵이면

약간 취기가 돌며
스르르 삶의 긴장이 풀립니다

가슴 짓누르던 근심과 불안의
그늘이 옅어집니다

달랑 천 원이면 해결되는
내 생의 슬픔입니다.

이렇듯
나의 슬픔은 참 가볍습니다.


+ 도봉산에서

어둠이 사르르
커튼처럼 내리는

도봉산 자운봉 오르는
비스듬한 길 중턱

이제는 정이 든
바위들 틈에 앉아

막걸리 한 잔의
행복한 성찬을 차렸다

저 아래 수많은
사람들의 집마다

귀가(歸家)의 불빛은
점점이 포근한데

저기 우람한 산봉우리는
말이 없네
  

+ 땅콩

세상 욕심과 거리가 먼 그 친구도
정 붙일 욕심 하나 필요했을까

호프집에 들어가면
500cc 생맥주 몇 잔에
허름한 안주 하나 시키는 것은
우리의 오랜 관습이건만

어쩌다 술자리 무르익어
호프 한 잔씩이라도 더하는 날엔
뿌듯하게 놓여 있던 안주도
어느새 우리의 인생살이 마냥
가난한 바닥을 드러내는데

때마침, 아롱아롱 주기(酒氣) 너머
벗의 당당하고 또렷한 외침
"여기, 땅콩 좀 더 갖다 주세요."

참 신기하게도
친구의 욕심은 늘 채워진다

불경기에 장사하기 힘들 텐데
싫다는 내색 없이
수북히 땅콩 한 줌  
선물처럼 얹어놓고 가는
술집 주인의 넉넉한 손길

그래서 오늘도
벗들과의 행복한 술자리  


+ 아차산 손두부

방금 쪄낸
아차산 할아버지 집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툼한 손두부 한 모에
걸쭉한 막걸리 한 잔 따라놓고

벗과 마주앉아
도란도란 대화의 꽃
피우는 날은

고단한 인생살이
온갖 시름이야
잠시 내려놓아도 좋은
행복한 축제일

허름한 옷차림의 서민들과
하산 길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의
구수한 대화를 귀동냥하며
술맛은 점점 좋아지는데

자꾸만 더 먹으라며
내 앞의 종지그릇에
두부 한 점 살며시
담아 주는
벗의 다정한 마음에

누추한 할아버지 집은
어느새 지상 천국이 되네


+ 오라, 인간의 집으로

여기는 인생 열차의  
간이역 같은 곳
아차산 산행길의
가빴던 숨 잠시 고르며
한 구비 쉬었다 가는
고향 마을 사랑방 같은 곳  

선한 눈빛의 할아버지가
사십 여 년 정성으로 빚어 오신
군침 도는 손두부 한 모 앞에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어렴풋한
첫사랑 연인의 뽀얀 살결 같은
우윳빛 서울막걸리 한 잔  
주거니받거니 하며
기분 좋게 달아오르는 취기(醉氣)에
세상 살맛 새록새록 움트는 곳

한세월 살면서 켜켜이 쌓인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의 짐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내보이며
순수한 동심으로 되돌아가
낡은 천 원 짜리 지폐 몇 장뿐인
지갑이 얇은 사람도
이곳에 들어서면 어느새
마음만은 넉넉한 부자가 되는 곳

오라,
세상의 벗들이여

사시사철 아무 때나 들러도
소박한 인정(人情)이 넘실대는  
따뜻한 인간의 집
아차산 할아버지 손두부집으로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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