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녀는 어김없이 오후 4시 무렵이 다 되어서, 학교 교문쪽에 나타났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 비록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내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집게 모양을 만들어, 두 손가락 안에 그녀를 넣어본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 하지만 그녀를 태운 저 망할놈의 검정색 새단은 오늘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차 한번 막히지 않고 도로를 질주해서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내 손 안에 남아있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가 떠난 교문 앞 빈 자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 오빠.. 오늘도 청승떨구 계시는 건가요?? 피...'
' 아.. 민정이 왔구나.. '
민정이는 같은 과 후배이자 그녀와도 상당히 절친한 친구이다.
민정이는 오늘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쪽지 몇장을 나에게 건네준다.
난 민정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내가 가지고 있던 글씨가 빽빽히 들어찬 연습장 몇 장을 민정에게 건내준다.
' 그럼 이번두.. 잘 부탁해.. 이제 며칠 안 남았어...'
' 치.. 오빠 뭐 좀 해봐요.. 남자가 왜 그렇게 쪼잔해요 쪼잔하기는..그리고 수업도 좀 들어오시구요.. 교수님 단단히 화나셨어요.. 졸업 학점 안 줄거라구 벼르시던데요... '
민정이 눈에는 내가 쪼잔해 보이나 보다. 아니 민정이 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를 쳐다봐도 내가 쪼잔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날 학교 출입 금지령이 떨어진 이후, 건달 30명 가량이 학교 주위에 배치되고 정문과 후문에만 5명씩 10명이 배치된 상황에서,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역시 그녀가 출발하고 난 후에도, 삼촌 깡패의 부하 녀석들은 교문 주위를 어슬렁 거리며 내가 나타나나 나타나지 않나 그것만 살피고 있었다.
나를 겁쟁이라 놀려도 내가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직접 그런 상황에 닥쳐본 사람이 아니면 그 기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이런말로 자위하면서, 그녀가 나에게 보내준 쪽지를 손에 쥐었다.
쪽지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다름아닌 민정이었다.
민정이는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해서 둘 다 죽을 표정을 하고 다니는게 보기 안스러웠던지, 자신이 고등학교때 써 먹었던 방법이라고 말 하면서 서로간에 쪽지를 교환해 보는게 어떠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리고 자신이 기꺼이 운반책을 하겠다는 말까지도. 우리는 그런 민정이의 아이디어를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받아들였고, 그렇게 쪽지를 주고받은지 근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삐삐사건 이후 그녀에 대한 삼촌의 감시는 더욱 심해져서, 남은 보름간 학교 오갈 때 소지품 조차 그 삼촌이라는 작자한테 검열을 받으면서 다녀야 했다.
그러므로, 편지지로 편지를 주고받는다는건 너무나도 무모한 발상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나 둘 다 연습장을 이용하여 연습장의 절반 정도를 영어단어나 잡설로 까득 채운다음, 나머지 반절에 정성스럽게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다행히 근 일주일간 아무런 해꼬지가 없는 걸 보면 이 방법이 삼촌에게 걸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난 조심스럽게 쪽지를 펴 보았다.
여러 가지 잡설 사이로, 그녀와 나만이 볼 수 있는 비밀의 사랑의 속삼임이 정성스럽게 쓰여 있었다.
' 오빠... 사랑하는 오빠.. 오빠는 저를 아주 먼 발치에서 나마 잠깐동안이라도 볼 수 있으시겠죠?
하지만 저는 달라요. 저는 오빠가 어디있는지 오빠의 얼굴, 아님 오빠의 손, 아님 오빠의 머리카락 하나 조차도 볼 수 없어요.
엄마는 삐삐사건 이후 작정을 단단히 하신 모양이예요.
매일 학교를 갔다오면 먼저 책가방을 일일이 검사를 하고, 그리고 나서는 그 이민혁인가 하는 사람의 자랑을 하면서 저녁 내내 시간을 보내세요.
저는 정말 요즘 지옥에서 살아가는 기분이예요.
그런데 만약 이렇게 살다가 진짜로 그 이민혁 인가 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전 정말로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하겠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지금의 우리보다 더 애절할 수 있었을까요.
견우와 직녀는 비록 364일동안 못 만나더라도 칠월 칠석날 단 하루는 하루종일 만나서 정겨운 사랑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데, 우리는 그렇게 1년에 하루라도 만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은 서로 안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는데, 저는 오빠를 볼 수 없는 만큼 오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가는 것 같아요...
사랑해요 오빠.. 보고싶어요... '
난 그녀가 내게 보내준 쪽지를 두 번, 세 번 계속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하지만 읽고 나면 남는건 그녀에게 쪽지를 받아 볼 수 있다는 만족감이 아니라, 내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절망감 뿐이었다.
비록 나는 내 자신을 '저건 어쩔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임꺽정이라구 해도 저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자위를 하지만, 내 자신이 무능력한건 결국 어떤 위로로도 감출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 자신의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쪼다같은 놈.. '
어제 저녁 잠을 못자게 했던 악몽의 말이 다시 머리속에 떠 올랐다.
그래 난 쪼다같은 놈이다. 쪼다같은 놈이라서 내 여자가 나의 바로 앞에서 나를 못만나 슬프게 울고 있는데도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주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 비하를 하면 할수록 난 헤어나올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 뿐이었다..
이럴 때 그녀의 용기를 주는 목소리라도 들어볼 수 있다면.. 그러면 정말로 힘이 날텐데.. 난 고개를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