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젤을 세워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었어.마음뿐만 아니라 눈도 귀도 온통 한 남자에게 향하고 있었어.
저 쪽 돌계단 끝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색이 바랜 청바지에 옷 속으로 사과 열 개쯤 충분히 감출 수 있을 정도로 헐렁한 체크무늬 남방셔츠를 입은 우리 학교 남학생.
나는 그의 이름도 나이도 몰라. 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은 알고 있어. 석고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내 마음이 더운물에 잘 풀리는 질 좋은 비누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
이런 기분 처음이야.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하고, 눈 앞이 어질어질한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결박당한 느낌.
그가 돌계단에 앉아서 혹은 서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째야. 나는 그가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가 저벅저벅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가 내 앞에 나타자니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암튼 뒤죽박죽이야.
순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파레트를 떨어뜨릴 뻔 했어.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오는 거야. 바로 그 순간 후두둑 내 가슴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숲을 보면서 바다를 그리고 있군요. 굉장한 상상력입니다."
그가 내 뒤에 서서 듣기 좋은 바리톤 음성으로 말했어. 그래, 나는 백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라일락 향기가 비누방울처럼 퐁퐁 날리는 초록빛 봄이 완연한 캠퍼스를 앞에 두고 11월의 바다를 그리고 있었어.
나는 11월의 바다가 그리워. 11월의 바다는 하늘도 바다도 모래밭도 온통 구름색일 거야. 우울한 회색, 그래서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편안함 같은 것을 주는 바다를 끼고 긴 머리를 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싶어. 아니면 내 뒤에 서 있는 그와 손을 잡고 달려보고 싶어.
"저는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송진우입니다."
그럼 내 이름도 말해야 되나?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입을 꼬옥 다물었어. 너 같은 애한테 조금도 관심없어 하는 쌀쌀한 표정으로
"이름이..... 아, 은하군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올려다봤어.
"숲을 보면서 바다를 그리는 여자와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름을 맞출 수 있는 남자. 어딘지 통할 거 같지 않아요?"
그가 채은하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내 가방을 가리켰어. 나는 픽 웃었어. 소리내지 않고 웃는 법을 그도 나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감상료를 내고 싶은데요."
"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그를 쳐다봤어.
"제가 매일 그림그리는 은하 씨를 훔쳐보지 않았습니까?"
나는 잠자코 있었어.
"자, 가지요. 우선 커피 한잔하고 인사동 화랑가를 한바퀴 순례한 다음 저녁식사를 하지요."
나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어. 내 거부의 표시가 너무 강경했던지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어. 나는 입을 꽉 다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그럼 내일 가지요,뭐."
그는 선선히 포기하고 돌아갔어.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나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을 거야. 붙박이 장롱처럼 여기 이렇게 서 있을거야. 나는 눈물이 쏟아져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
내가 소아마비라 왼쪽 다리를 저는 거, 그게 절망이 되어 눈물 흘린 적은 별로 없었던 거 같은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오빠는 내게 늘 힘이 되어 주었어.
"다리를 저는 거, 그건 눈 나쁜 사람이 안경 쓰는 거와 다를 게 없단다."
아버지는 늘 그런 말씀을 하시며 손님들이 집에 오시면 제일 먼저 나를 손님들께 소개시켰어.
"제 막내딸입니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지요. 하하하."
언니와 오빠도 마찬가지였어. 등하교길에 나를 만나면 친구들에게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소개시켜 주었어.
"내 동생이야. 이쁘지? 난 이 세상에서 동생 없는 애가 젤 불쌍하더라."
어머니도 나를 특별취급하지 않으셨어. 언니,오빠와 똑같이 내 방 청소는 애가 해야 했고,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학교 다녀야 했고, 장보기 심부름도 했어.
나는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 덕분에 내가 지체부자유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았어. 조금 불편할 뿐 마음의 그늘이 되지는 않았어.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내가 왼쪽 다리를 저는 게 거대한 바위덩어리처럼 나를 짓누르기 시작한 거야. 송진우라는 남자 때문에... 나는 죽어도 그 앞에서 걷지 않을거야. 절룩거리는 내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을거야. 내 목숨을 걸어도 좋아.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교정 한 귀퉁이에서 이젤을 세워 놓고 그림을 그리는 나를 찾아왔어.
"짠."
장미다발을 뒤에 숨겼다가 불쑥 코 앞에 내밀기도 했고, 동전을
주머니마다 가득 채우고 물구나무서기를 해서 은빛 동전이 흰 눈가루처럼 눈부시게 좌르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여주기도 했고, 시를 한 편 써보았노라며 시인처럼 폼을 잡으며 시 낭송을 하기도 했어. 그 시라는 게 너무 유치해서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죽을 뻔 했어.
한밤중 문득 눈을 뜨면 떠오르는 네 얼굴. 보고 싶구나
아, 보고 싶어 미치겠구나아.
그런 내용이야, 글쎄.
"연극구경 갑시다. 친구녀석이 나오는 연극이라 안 가면 친구녀석이 친구 그만 하자고 할 거에요."
이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말이 바로 그거야. 그의 입에서 어디 가자는 말이 나오는 거. 난 또 세차게 도리질을 했어. 그는 아무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돌아서 가는 거야.
어깨가 축 처진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어떤 갈망으로 확확 불이 붙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어.
걷고 싶다. 제대로 걷고 싶다. 그의 팔짱을 끼고 재잘재잘 종달새처럼 떠들며 어디든지 가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걷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거야. 이 세상 누구앞에서도 걸을 수 있지만 그 앞에서만은 절대 안 걸을 거야.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어. 갑자기 그대로 땅속으로 꺼지고 싶을 만큼 외로운 거야. 죽음보다 나을 게 없는 게 혼자 남겨진 외로움이야. 나는 개구쟁이 소년처럼 소매 끝으로 눈물을 쓰윽 훔쳤어.
은하야, 여기까지 잘 왔잖니? 끄떡없어.
나는 왼팔로 오른팔을 툭툭 쳤어. 자,용기를 내자구 하는 뜻으로. 그런데 안 되는 거야. 자꾸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그때 누군가가 불쑥 내 앞으로 손수건을 내미는 거야. 고개를 들어보니 그였어.
"연극구경 갑시다. 슬픈 연극이니까 거기 가서 울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어.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왜 꼼짝 않고 이 자리만 고수하는 겝니까?"
갑자기 그가 소리치기 시작했어. 나는 어쩔 줄 몰랐어.
"자, 갑시다."
그가 우악스럽게 내 팔을 잡아챘어. 그 바람에 나는 휘청거리다가 그의 품에 안겼어.
"나랑 같이 다녀요. 어디든지."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어.
"난 그럴 수 없어요...."
나랑 같이 다니면 당신이 창피할 거예요. 아니 내 걷는 모습을 보면 내가 싫어질 거예요. 난 그게 두려워요.
나는 내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 때문에 그의 가습을 내 눈물로 적시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어.
"이런 바보. 이런 바보를 내가 사랑하다니. 당신이 절룩거리며 걷는다는 거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를 올려다 보았어.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요. 내게 문제되는 건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것뿐이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하고 늘 함께 있고 싶어요."
아,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그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말했어.
"처음 교정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참 감사했어요. 당신의 걷는 모습을 보고 더욱 감사했어요. 내가 당신을 발견했다는 것,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해요."
나도 그래. 나도 그가 내 앞에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그의 집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그가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할 수 있을지 없을 지.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미소를 지었어. 나는 씩씩하게 절룩거리며 그의 팔짱을 끼고 교문을 향해 걸었어.
그의 친구가 단역으로 나오는 아주 슬픈 연극을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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