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고향
지은이:오정희
내 마음의 고향
당신에게 깃드는,
깃들이는 집
삶의 풍경 저녁 산책
봄이 오는 소리
우울증에 대하여
딸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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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불이 밝히기 전 저물녘. 가끔 집을 떠나 사는 아이의 전화를 받는다. 별다른 용건이 없는 평범한
문안 전화를 받으며 나는 아이가 뭔가 몹시 몸과 마음이 고달프거나 외로움을 느끼는 거라고 집착하며
짐작하며 마음이 찡해진다. 대화 도중 ,역에 닿는 기차 소리가 끼어들면 아이의 목소리에 와락 반가움이 실린다.
아이에게 너무나 친숙한 저녁의 정경. 어스름이 깃들이는 집안에 감도는, 에프엠에 다이얼을 맞춘
라디오의 음악 소리와 함께 찌개나 생선 굽는 냄새, 성장기의 추억이 배어 있는 작은 도시로 들어오는
기차 등등을 동시에 그립게 떠올리는 것이리라. 고향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태어나 태를
묻은 곳이 아닐지라도 마음 깊숙한 곳에 따뜻하고 은은한 밀물처럼 묻어 두고 있는 곳. 어떤 장소,
어떤 공간,어떤 시간, 어떤 마음들.그래서 언제나 그리운 것들.
나는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곳보다는 오히려 아홉 살 무렵부터
열 세살까지 살았던 인천의 차아나타운을 고향이라 여기고 있다. 고작 4년 정도의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그 전후의 어느 때보다도 길고 깊고 생생하다. 정신의 예민한 성장. 유년기로부터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세상에 대해 새롭게 눈 뜨던 시기와 맞물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섯 해에 걸친 피난살이를 마치고 트럭의 짐칸에 실려 밤새 험한 길을 달려와 이른 새벽 축축한 안개
속으로 처음 그 도시와 만났을 때의 낯설움과 느닷없이 팔뚝에 소름 돋게 하던 외로움의 느낌은 지금
도 생생하다.
전쟁으로 부서지고 무너진 집들을 복구하느라 거리 곳곳에서 끓이던 해인초 냄새와 석회 냄새, 망치질
소리, 봄의 나른하고 몽롱한 어지럼증과 메스꺼움, 외국 국기를 단 선박들, 쓰레기와 죽은 고양이의
시체가 떠 밀려오던 선창가 언덕배기 중국인 거리 들이 이 무렵 내 의식과 정서의 뿌리를 이루는 셈이다.
무더운 여름 한낮에도 인기척이 없이 굳게 덧문까지 닫힌 크고 생소한 양식의 집들, 저물녘이면
긴 그림자를 끌고 유랑의 무리처럼 소리 없이 모여들던 중국인들에 대해 아이들은 온갖 괴괴하고
비밀스럽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꾸며 퍼뜨렸다.
그리고 검고 슬픈 얼굴을 한 이국 병사의 팔에 매달려 공원 계단을 오르던 아름답고 화려한 양공주
들의 높은 웃음소리와 그네들의 몸에서 풍기던 달콤하고 분방한 향기는 인생의 불가해한 비밀 한 가닥
을 얼핏 보여 주는 것 같지 않았던가.
그 곳을 다시 찾은 것은 떠난지 30년이 넘어서였다. 내 정서의 뿌리. 문학의 출발점이라 여기고
있으면서, 언제라도 쉽게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발길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마음의 공간을 오롯이 간직하고 싶었던 때문이었을까.
소설<중국인거리>와<바람의 넋>을 쓸 때 줄곧 내 마음이 가 있던 곳은 바로 그 장소지만 가이하게도
실제로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이미 그곳은 내게 역사적 현실적인
한 장소가 아닌,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자리잡고 있기에 굳이 가볼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도 모른다.
흐름이 그친 시간처럼 앞뒤 연결없이 홀로 고립된. 이미 지상에는 없는 한 공간.
몇해 전에야 자료 촬영을 위한 출판사의 요청에 의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의당 볼품없이 작고 초라하리라 생각하였던 옛집과 거리의 모습이 기억속의 정경과 조금도 다름없이
남아 있었다. 그때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이제 화멸을 넘어설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은
것이다. 내가 조금 일찍 이곳을 찾았더라면 분명히 기억보다 훨씬 초라하고 남루하고 작은 집과
거리에 슬프고 마음이 아파서 고개를 돌렸을 것이가.
어린날의 내가 수없이 드나들엇을 문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으니 문간방에 해맑은 얼굴로 조용히
앉아 계시던 정신나간 할머니와 골방 구석에서 연애소설 읽기에 푹 빠져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환히 보이고 젊었던 아버지의 거침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