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물과도 같이 빠르게 흘러, 드디어 종강이 내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과 종강파티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 그녀 역시 종강 파티에 참석할 것이므로, 나는 혹시나 내가 그녀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아침부터 교문이 멀찍히 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 교문을 바라보고 앉았다.
오늘 과연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근 보름만에 보는 건데.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물어봐야 되나. 아님 아무말 없이 그냥 안아줘야 하나. 아님 입맞춤을 해야 하나. 아니..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상상에 들떠 있다니..
나는 이런 내 자신을 한심해 하며 교문앞에 검정 새단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검정 새단이 학교 교문 옆에 나타났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녀와 함께 다니는 경호원이 옆좌석에서 나와 문을 열자 모자 쓴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그녀.. 요즘 계속 모자를 쓰고 다닌다.
나와 함께 학교를 다닐 적에는 모자를 쓴 적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멀리서 보는 거지만 그녀 얼굴이 너무 안 돼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닌 것 같다.
지금 내 얼굴이 훨씬 더 말이 아니니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는 벌써 교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안타까운 한숨을 쉬며, 그녀가 들어간 교문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형......형.......!! 뭐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교문만 바라보며 멍하니 있던 나를 동민이가 와서 흔들어 깨웠다. 동민이는 이런 내가 너무도 안스러운지, 측은한 눈빛을 띄며 말을 이었다.
' 형.. 오늘 과 종강파티 있는 건 아시죠?'
' 어... 엉...'
' 오늘 제가 수시로 상황 보고 해 드릴테니까는, 어디 가지 마시구 여기 잠자쿠 앉아 계셔야 되요.. 알았죠?
혹시 오늘 성미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니깐..'
'어.. 엉...'
동민은 내가 맨정신에서 대답하는건지 , 아니면 몽롱한 상태에서 대답하는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다가, 자신의 삐삐를 나에게 건냈다.
'형.. 제가 제 삐삐 형한테 드릴테니까요, 이거 가지구 제가 학교 상황 연락드릴테니까는 확인하세요.
그런데 성미는 음성 못 넣을거 뻔 하니까, 음성 오면 바로 저 인줄 아세요.
어젠가 성미가 저한테 쪽지로 말을 해 주는데, 자기 몸 어딘가에 지금 도청장치가 붙어있 데요..
그래서 요즘은 친구들이랑두 형과 관련된 대화는 다 쪽지로 하구 있어요..참... 사랑이라는게 뭔지...휴우...''
동민이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는, 이내 수업이 있다고 말하며 학교로 들어갔다.
비록 동민이가 저렇게 말은 했지만,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동민이 삐삐로 음성을 남길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메시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동민이가 수업 들어 간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삐삐에 음성이 하나 들어왔다.
난 긴장 된 손으로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실망스러웠지만, 동민이였다.
' 형 나 동민인데.. 오늘 학교 분위기 장난 아닌데.. 평소에 못보던 덩치좋은 애들이 주변에 많이 눈에 띄어. 근데 평소때는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는데, 오늘은 내 주변에도 나를 감시하는 애들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왠지 기분이 오싹하군. 그럼 형 내가 점심때 쯤에 다시 한번 연락할께...... '
난 동민이의 메시지에, 그놈들이 동민이한테 해꼬지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잠깐 들었지만, 얼마 안 있어 오늘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에 온몸이 사로잡혔다.
오늘 못 본다면 내일은 종업식. 내일은 다른 날보다 수업도 일찍 끝나고, 또 내일 저녁에 그녀가 학교에 머물만한 구실은 하나도 없다.
즉, 오늘 못 보면 내가 그녀를 볼 수 있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워 지는 것이다.
난 목이 타 왔다.. 물을 두잔이나 들이켰지만, 목의 갈증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동민이의 두 번째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 메시지는 아까 메시지와는 다르게 약간감이 멀게 느껴졌다.
나는 그 이유를 이내 알 수 있었다.
'형.. 저 동민인데요.. 저 지금 화장실에 들어와서 친구한테 핸드폰 빌려서 입 가리구 전화하는 거예요.
지금 성미하고 친한 애들한테 건달 한명씩 다 붙었어요,
물론 저한테도 한명 건달이 붙었구요. 공중전화로 이 이야기 했으면 정말 큰일날뻔 했네요. 그러니 혹시 말이 잘 안들리더라두 양해하세요.
아까 성미랑 글로 이야기 했는데 ,
아침에 엄마랑 삼촌 이야기 하는 거 들으니 오늘 학교 안에만 20명, 학교 밖에는 약 40명 가량의 건달들을 배치 한다구 하더래요.
즉, 오늘 학교 주변에 엄청 감시가 살벌하단 말이죠. 그래서 성미한테 혹시 형한테 뭐 전해주고 싶은거 없냐고 물으니깐, '
오빠 오늘은 정말로 위험한 것 같으니까 절대로 제 곁에 다가오지 마세요.
오늘 종강파티에도 아마 그들이 계속 따라다닐꺼예요..그러니 절대로 오지 마세요' 라고 전해주라고 하더군요.
형.. 오늘은 성미 말대로 정말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금있다가..
성미한테 형 있는 카페 위치 말해줬으니깐, 교문 나갈 때 성미 얼굴이나 보세요. 그럼 이만..'
수화기를 잡고 있는 손의 맥이 탁 풀리면서..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정신을 차리고 수화기를 다시 전화기 위에 올려놓은 뒤, 나는 창가에 있는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 앉았다.
학교밖에 40명이라..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숫자였다.
난 절망에 빠진채 ,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쳐박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절망감에 짓눌려 잠깐 잠이 들었었나 보다.
시계를 쳐다보니 시간은 5시를 향하고 있었다. 5시.. 조금만 있으면 먼 발치에서나마 다시 그녀를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아까의 절망감을 떨쳐버리고,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임을 안고 가지고 있던 워크맨 이어폰을 귀에 꼽으며 교문을 바라 보기 시작했다.
몇곡의 노래가 지나간 후, 4시 수업이 끝난걸로 보이는 학생들이 몇몇씩 짝을 지어 교문 밖으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하는군.. 나는 긴장하며 귀에서 이어폰을 뽑아 손에 들고, 창에 얼굴을 붙이고 눈을 크게 뜨고 교문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한명.. 두명... 사람은 계속 지나가는데, 같은 과 사람들과 그녀는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
난 초초한 마음을 달래려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후우...하아...후우.. 하아...'
그녀랑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지 어언 13일째, 하지만 오늘은 잘만 하면 비록 가까이서 얼굴은 못 보더라도 먼 발치에서나마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것도 같았다. 난 고개를 돌려 카페 뒷면에 붙어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은 후, 다시 눈길을 교문쪽으로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아......'
동민이가 앞장 선 채, 같은 과 사람 20여명과 함께 그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지난 한달가량 보아온 짜증나는 경호원놈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교문쪽으로 나오면서 이쪽을 힐끔 힐끔 보는 것 같더니,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을 한 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새단에 다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약간 긴 시간동안 새단 기사와 이야기를 한 후, 자신을 따라 다니는 경호원 놈에게도 신경질적인 얼굴로 뭐라고 쏘아댔다.
그러자 그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누군가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더니 새단을 타고 교문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새단이 사라져 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본 후, 과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문 곁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손에 들고있던 워크맨 이어폰을 바닥에 팽개치고, 두 손을 창틀에 올리며 최대한 유리쪽에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너무나 보고싶던 그녀... 비록 먼 발치에서라지만, 나는 너무나도 기쁜 맘에 가슴이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