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날씨는 더욱 쌀쌀해져 갔다. 그리고 우리 둘은 학생으로서 맞이하는 마지막 겨울방학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아직 방학이 한달정도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를 구상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있었다.
그날,. 그 악몽이 시작되는 날도 우리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방학때 어디서 뭘 할것인지 계획을 세우며 둘이 팔짱을 끼고 오손 도손 학교 교문을 걸어나오고 있었다.
' 성미야.. 올 겨울엔.. 우리 겨울 바다에 한번 놀러가는게 어떨까..
우리 아직 한번도 못 갔잖아.. 주인아저씨께 부탁하면.. 한 3일 정도는 낼 수 있을지도 몰라..'
'헤헤... 것두 좋지~~~'
성미는 내 팔에 꼬옥 안기면서 웃으며 좋아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아무것도 못 해 준 나.. 이번 겨울방학에는.. 정말로 추억에 남을만한 날들을 준비해 봐야 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며 교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학교 교문을 벗어나면서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우리 주위를 엄습해 왔다.
평소 학교 근처에서 볼 수 없었던 검정색 새단들이 3대씩이나 교문 옆에 주차되 있었던 것이다.
'.........'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 역시 무언가를 느꼈는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말을 멈추었다. 뭘까..이 기분.. 이 싸늘함..
난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검정색 선팅으로 잘 보이지 않는 새단 창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철컥........'
'앗........'
그녀의 짧은 외마디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정새단 하나의 뒷문이 열리면서 검은 양복을 입은 한 거구가 튀어나왔다.
'김......성.......미......'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우리는 모두 제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나는 저승사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 사람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우리 곁으로 한발자욱 한발자욱 성큼 성큼 다가왔다.
그사람이 나에게 조금씩 가까워 지면서, 나는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180이 넘는 키에 90은 되어 보이는 몸무게, 양복 아래로 불거져 나온 근육, 또 그 사람 뒤의 새단 속에서 제각기 썬그라스를 쓰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수많은 덩치들. 난 직감으로 이 사람이 흔히 말하는 조직 폭력배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사...사..삼...삼촌..'
이 덩치가 내 앞에 서 있다는 두려움은, 그녀의 이 말 한마디에 황당함으로 바뀌어 버렸다. 삼촌이라니. 이 덩치가 성미의 삼촌이란 말인가.
난 성미와 그 덩치를 황당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며,내 눈 앞에 벌어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도대체...
'퍽..........'
하지만 평소처럼 나의 생각을 끝내기 전에, 내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아무래도 뺨을 한 대 맞은 모양인데, 내 몸은 철봉에 부딪친 양 공중에서 한바퀴를 돌아서 땅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 삼촌~~~!!'
'찰싹........'
난 쓰러져 있어서 누가 맞는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 역시도 뺨을 한 대 맞은 듯 했다. 잠시후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새단쪽에서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우리쪽으로 다가오더니, 울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새단 쪽으로 멀어져갔다.
주변 사람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워낙 살벌한 분위기라서 감히 끼어들 염두를 못 내고 단지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나는 워낙 세게 맞았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하고, 단지 앉은 자세에서 고개만을 들어 그녀의 삼촌을 올려다보았다.
' 첫 번째 경고다. 다시는 성미를 만나지 마라. 만나면 죽는다. '
그 삼촌이라는 자는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비수가 되어 내 가슴속에 꽃혔다.
내 입과 코에서는 짭짤한 무언가가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고, 나는 그 말에 감히 저항을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떨구었다.
삼촌과 그녀를 태운 새단은 나의 흐린시야 너머로 아득히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언젠가는 다가올 것 같다고 육감으로만 느껴졌던 악몽..
그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난 정신을 잃었다.
.
.
.
여기는 천국일까 . 지옥일까. 아까 일어났던 그일. 기억 저편 너머로 아득히 떠오르는 그 일. 나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닌 꿈이기를 바랬다.
다행히도 이런 나의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해 주려는 듯, 내가 눈을 떠서 처음 본 것은 우리방 천장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했다.. 그런데..
'앗...'
입술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리고 이빨 있는 곳이 지끈 거려왔다.
' 어.. 형 일어나셨어요?? 휴 다행이네..'
알고보니 아끼는 후배 녀석 하나가, 내 옆에서 TV를 보고 있다가 내가 일어나는 걸 보고 말을 건 거였다. 난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아파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형.. 병원간거 기억나요??? 입술 네바늘이나 꿔맸는데.. 그리고 이빨 두 개나 빠졌어요..'
난 내 입이 지금 말이 아니라는 사실 보다도, 아까 일어났던 그 악몽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된 대 대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그게 꿈이 아니라 .. 현실이었다니.
난 아픈몸을 이끌고 일어나, 내 삐삐부터 찾았다.
다행히 삐삐는 그 와중에 어디로 떨어지지 않고 내 주머니 속에 잘 넣어져있었다.
그녀로부터 음성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나는 즉각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 오빠.. 나야.. 오빠.. 흑...오빠.. 우리 이제 어떡하지.. 삼촌.. 우리 삼촌 정말 무서운 사람이거든..
난 엄마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엄마가 삼촌한테 우리 사이를 떼어 놓으라구 부탁을 하셨나봐.. 흑.. 오빠..
우리 이제 어떡해.. 흑... 오빠.. 그리구 아까 삼촌..
집에 오셔서 우리방에 있던 전화기 코드도 뽑아버리셨어..
나.. 나 이제 전화두 못하게 생겼어.. 어떡해...어떡해...흑..'
그녀는 음성을 남기는 내내 연신 훌쩍훌쩍 거리며 말했다. 메시지를 받는 나의 가슴도 미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잘 안열리는 입으로 아무일도 없을거니 걱정하지 마라고, 오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녹음을 끝마치기 전에, 그래도 모르니까 우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당분간은 연락하지 말고 지내자고 말했다.
이 말을 하고 별표를 누른 뒤, 난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절망감에 짓눌려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오빠..오빠 뭐하는거야.. 수업중에 졸면 어떻게해~ 어서 일어나~~'
난 그녀의 말에 눈을 떴다. 강의실에서는 교수님의 수업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