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암울했던 우리 나라의 격동기에 광주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민주투사의 대오에 앞장서다 도피중인 오현우라는 청년과 그를 감추어주며 달래랑 머루당 따먹고 청산에 천년을 살으리랐던 미술교사 한윤희와의 짧고 애절한 사랑이야기 사이로 전개되는 가슴아픈 사연들이 여러분의 심금을 울려줄것입니다.
장길산 등의 소설을 쓰신 작가 황석영님의 역작을 음미하실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성 낙 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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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석영 님의 『오래된 정원』은 격동기 80년대의 한국사회와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젊은 두 주인공 오현우와 한윤희가 겪은 역경속의 삶과 사랑을 회상과 편지글, 비망록과 기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교차적 서술방식을 통하여 서정적이며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 작품으로 암울했던 한국의 한 시대를 음미할 수 있는 역작이라고 평가할만하다.
작품을 이어가는 두 주인공은 80 년대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무기징역 수감 생활을 하는 오현우와 도피 생활 중 그와 반년 동안 동거했던 약혼녀 한윤희이다.
작품내의 시간과 공간은 18년 동안 두 주인공의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시기와 장소로 교차되면서 다변적 시점으로 전개된다.
첫 장면은 무기수였던 오현우가 18년 동안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감하는 날 새벽, 점호로 하루를 여는 감옥의 삭막함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우가 출감하는 시점이 작품의 출발점이 되는데, 마치 불교의 윤회론적 인과관계처럼 18년 후의 현실은 18년 전의 얽힌 행동의 결과이며 그 결과의 원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역행적 구조이다. 거기에 윤희와 현우의 상이한 입장에서 하나 하나의 사건들이 모자이크처럼 제 모습을 찾아가고 합쳐지는 복합적 시각이 그들의 내면적 심리세계를 현재로 융합해 낸다.
출감 후 마중 나온 조카가 군대까지 다녀온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 동안의 간격을 오현우는 시간이 정지된 감옥 생활의 단절로 어색하게 받아들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도 일 년 뒤에나 통보 받을 수밖에 없었던 닫혀진 공간 감옥의 무기력감은 석방된 뒤에도 탁 트인 도시의 거리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를 길모퉁이 한 구석에 주저앉게 만든다. 병원에서 며칠 동안 요양한 뒤 그는 흩어진 십 수년 전의 동지들을 만나러 간다.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던 이름 빛고을 광주의 피빛 열정은 사그라들고 몇 개의 무덤과, 그때의 기억을 감내하지 못해 정신 병원에서 죽어간 동지들의 소식, 투쟁 대오에서 일탈되어 생활로 돌아간 사람들의 푸념, 그 몇 가지 초라함들 속에서 현우의 기억은 군사 독재 시절의 무시무시했던 18 년 전 청년으로 돌아간다.
1970년대 유신 시절의 개헌 철폐투쟁으로부터 광주 민주화 항쟁을 겪으면서 열혈 청년 현우와 그 동지들은 사회 정의를 꿈꾸는 민주 투사에서 반 외세 자주화의 들끓는 혁명 전위로 변모해 간다.
억압과 차별이 없는 평등세상과 간섭없는 민족 단일로서의 통합을 추구하며 누가 누구의 규정된 조직인지 알아서는 안되는 엄혹한 지하 활동, 정련된 사상학습 속에서 현우는 선진적 선전가에서부터 생활과 결합하는 직업적 대중 활동가를 지향한다.
민주화 운동의 탄압으로 인하여 현우는 소위 '잠수한다'는 운동권 은어처럼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검거 열풍이 불면서 시골로 잠적한 그는 그의 잠수 생활을 도와주게 된 시골 여교사 한윤희를 만나게 된다.
선배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부닥치게 된 여자 윤희는 운동권이 아니였지만 빨치산 출신의 아버지를 업보처럼 안고 살았던 가족 관계로 인하여 현우의 잠행을 동거생활이라는 과감한 헌신으로 도와준다.
응석을 부리듯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우며 지내던 두 사람은 푸르른 청산에 천년을 살 것 같았고 그들의 무성한 여름날 시간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정지된 현우의 과거 속에서 가장 빛나던 기억이 되었다. 둘 만의 작은 단칸방, 갈뫼의 한가로운 평화가 풍성한 서정의 결실로 익어갈 무렵, 현우의 사진이 조작된 간첩단 사건 조직책으로 신문에 실리게 되면서 그들의 소꼽장난 사랑의 굴뚝은 연기가 그쳤다.
시골 아낙네처럼 꽃무늬진 촌스런 치마, 주름진 치맛 자락아래의 고무신을 끌고 그어 대는 빗줄기 사이로 그를 마중하던 얼굴조차 우산에 가리워져 희미한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결코 알 수 없었던 미래이기에 '잘 있어요'가 아닌 '다시 돌아올께'라는 인사로 윤희와 현우는 영원한 작별을 한다. 현우는 '내년 봄까지만 있어 주면 안 될까요', 라는 윤희의 만류와 가끔씩 풋사과를 사다 달라던 식성의 작은 변화가 담고 있는 그 의미 즉 윤희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녀의 곁을 떠난다.
갈뫼를 떠난 현우가 곧 바로 체포됨으로써 윤희의 운명은 기다림의 격정으로 바뀌게된다. 이것은 사랑과 재회의 약속이 허용되지 않는 절박한 시대를 보여주는 가슴아픈 단면으로 기억된다.
간첩 은닉죄로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는 상태에서 얼마가 될 지 알 수 없는 막연한 기다림을 각오한 채, 윤희는 미혼모가 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갈뫼에서 아이를 낳는다.
0.75 평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공간과 냄새 지독한 변소를 동시에 밝혀주는 교도소. 그 곳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지조차 몰랐던 딸, 은결이가 있는 줄도모르고 현우의 18년은 서른 두 살, 윤희와의 이별한 그 순간을 끝으로 정지된 채 자신을 지켜내는 싸움으로 일관될 수 밖에 없었다.
윤희가 죽은지 3년이 지나서 출옥한 현우는 몇 년동안 꼼꼼히 적어 둔 그녀의 편지와 일기를 읽으며, 윤희가 낳은 은결이라는 현우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현우는 가슴이 미여지는 슬픔과 윤희에 대한 연민이 송두리채 가슴으로 밀려든다. 나는 인생의 잔인함을 처절한 가슴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인생의 잔인함을 처절한 가슴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에 그녀가 갈뫼에서 보냈던 일들과 그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생활, 우정, 사랑, 유학 생활, 지향하는 예술의 세계 등을 추억하게 된다.
현우의 삶을 보조하던 역할에서 윤희는 80년대 중반과 90년대의 꿈틀대는 한국 역사의 역동성을 체험하게 된다.
1984년 봄, 타의로 미술 교사를 사직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윤희가 돌아온 캠퍼스는 자욱한 최루탄과 걸핏하면 도서관까지도 무단 점령하는 시위 진압군이 뒤엉긴 회색의 혼돈상태였다.
폐병을 앓는 부잣집 아들이면서도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운동권 복학생인 송영태, 법대생이라는 사회의 안일한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노동 운동에 뛰어든 미경을 알게 된 윤희는 그들의 조직 일을 돕게 되는데 이는 현우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감옥에 간 선배의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윤희를 사랑하게 된 영태와 영태를 사랑하는 미경과의 수 년동안 평형을 이룬 삼각관계보다 그들의 삶을 더 급박하게 했던 것은 궁극으로는 같으나 예술과 노동과 운동이라는 서로 조금씩 다른 외형의 셰계관과 이를 풀어내는 행위였다.
1987년 6월 항쟁은 6.29 선언에 의해 중간계층의 이탈로 종결되고 7, 8 월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도 시들어갈 무렵 노동 해방의 마지막 타오르는 불길이 되고자 미경은 분신 자살을 한다. 그녀가 불타는 육체를 투신했던 공장 옥상을 찾은 윤희는 그 무심한 현장에서 최루탄 가스에 눈물 흘리며 무조건 돌진하던 강직한 사회 운동의 몰락을 감지한다. 방황하던 윤희는 1988년, 기만적인 올림픽이 치러지던 해에 딸 은결이를 동생부부의 호적으로 올리고 동병상련의 음울한 도시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다.
사회주의자로서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현우에 이르기까지의 강박 관념과 이 업보로부터 자유를 갈구했던 그녀는 이국 땅 베를린에서의 고독을 낯선 남자 이희수를 통해 따뜻히 위안 받는 가운데 자본의 힘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동구권 사회주의와 독일 통일의 세계적 변화를 지켜본다. 변화된 세상속에서 현우의 격정과는 다른 자신의 세계관을 신뢰하는 희수의 성실성과 개인주의에 윤희가 매료되어 갈 무렵 희수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상처받은 윤희는 송영태와 동행하여 시베리아 대륙 횡단 여행을 마친 후 윤희는 자신을 둘러 싼 이 모든 인생의 무거움을 느낀다.
청춘의 폭풍우가 지나간 중년의 나이가 되어 돌아온 윤희는 자신을 돌아 보며 비로소 세상을 움직이는 내부에 숨은 힘이 모성임을 자각하게 된다. 생명을 창조함으로 세계를 창조하고, 모든 사람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를 주제로 승화된 예술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윤희는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전에 자신이 자궁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윤희는 현우가 떠나기 전날 그려진 젊은 날 현우의 초상화에 사 십대 여인인 자신의 얼굴을 그린다. 그 그림은 청춘의 고뇌를 담은 현우를 무한한 모성으로 감싸안는 윤희의 예술 세계의 결정체임을 시사한다.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 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컴컴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 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것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
죽음을 앞둔 윤희가 펑펑 눈 내리는 1995년 겨울 갈뫼를 찾아와 남긴 편지의 정답을 현우는 청춘을 버린 대가로 얻게 된다.
『오래된 정원』이란 우리네 인간들이 동경하는 낙원의 세계이며 우리의 부질없는 욕망으로 상실한 유토피아이다.
윤희는 그 낙원을 찾았냐고 현우에게 질문하고 있다.
이상주의에 한 평생을 묻고 삶의 제자리로 돌아온 현우에게 실현된 가치를 판단하기를 바라는 윤희의 질문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인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살았던 한 시대를 반추함으로써 우리의 정치 사회가 역사의 뒤안길로 되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작품을 통하여 내게 큰 감명을 주신 황석영 님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