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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달에 울다?
제목이 어법에 맞지 않아 무슨 뜻인지 가물가물 합니다. 가물가물하다는 말은 물 위로 힘차게 경쾌하게 기분좋게 차오르는 날치보다는 물 위로 고개를 조금 내밀 뿐 좀처럼 몸 전부를 보여 주지 않는 어미 고래 같단 말입니다. 그래도 고래는 어쩌다가라도 그 육중한 몸을 공중으로 띄우는 때가 있는데, 이 제목은 좀체로 의미가 포착되지 않습니다. 달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울다? 달에 눈길을 주다가 울다? 뭐 그런 뜻이겠지, 막연히 생각할 뿐.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과 그 병풍 앞에 누운 사람의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서 이 소설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10살- 30년 전- 봄- 어스름달- 갈대- 볏집을 채운 요
20살- 20년 전- 여름- 초승달- 초록 풀- 싸구려 담요
30살- 10년 전- 가을- 청명한 명월- 초원- 호사스러운 이불
40살- 현재- 겨울- 잘 갈아진 겨울달- 호수- 전기담요와 전기요.
그러니까 주인공은 소년 시절에는 \"볏집을 채운 요\"를 깔고 쪼그리고 누워 \"어스름달\"을 보며 자랐고, 서른 무렵에는 \"호사스러운 이불\"과 \"청명한 명월\"을 보며 살았군요. 마흔을 묘사하는 \"잘 갈아진 겨울달\"과 \"호수\"는 무엇일는지. 아직 마흔이 안 되어서 못 느끼는 것일까요?
그거 기억 나시나요?
씨뿌리는 20대도
가꾸는 30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40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걸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끌어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고 말한 사람은 지리산에서 죽어간 저 시인 고정희입니다. 세상에, 마흔만 되면 벌써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고 말하다니. 아직 진짜 인생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곧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니.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그렇게 많은데. 좀 심하죠?
그림 속의 사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경계가 지워집니다. 이걸 겐지는 이렇게 말
합니다.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지, 그런 건 아무도 말 못해.\"(새조롱을 드높이) 그렇군요. 주관적인 생각과 객관적인 현실이 거의 구분이 없습니다. 머리 속의 추측이 곧바로 현실이 되고 기정사실이 됩니다. 현재인가 싶더니 어느새 과거, 추측인가 싶더니 어느새 현실! 아니면 적어도 겐지에게는 현실은 생각이 번져서 된 무엇입니다. 참 신기하죠? 생각이 번지면 현실이 된다니. 아마도 겐지의 소설이 매력있게 느껴진다면 아마 이런 맛 때문일 겁니다.
이런 느낌은 어쩌면 정호승의 시 <별똥별>과 닮았습니다.
밤의 몽유도원도 속으로 별똥별 하나가 진다
몽유도원도 속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사내
천천히 일어나 별똥별을 줍는다
사내여, 그 별을 나를 향해 던져 다오
나는 그 별에 맞아 죽고 싶다.\"
(<별똥별> 전문)
형식 자체가 참 독특합니다. 그 여백. 시에서의 연(聯)과 같은. 이끄는 문장 하나, 그리고 거기에 딸린 한 단락짜리 부연 설명. 이런 형식은 강제로 독자의 호흡을 끊어 놓습니다. 내용은 계속 이어지는데도 억지로 떼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걸, 대충 지나치며 읽지 말아 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입니다. 몇 줄 읽고 한참 생각하고, 또 몇 줄 읽고 한참 생각해 달라는 주문. 라면이나 물국수 먹듯 후루룩 읽어 치우지 말고 제발 곰곰 생각하면서 읽어 달라는 주문. 어쨌든 여운이 있어서 좋습니다.
힘들게 힘들게 자신 속의 무엇과 싸우는 게 느껴집니다. 그 싸움이 없어지면 편안해질까요? 아닐 겁니다. 그런 싸움이 있고서야 비로소 삶이 빛나는 것 같습니다. 그럴 겁니다. 자꾸 싸우고 싸우면 무엇인가가 확인되고, 그러한 확인들이 쌓여서 삶의 어둡던 구석들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일 겁니다.― 그런 느낌을 주는 책이군요.
\"아아, 좋은 꿈을 꾸었어.\" 나에게도 이 말이 마지막 말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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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조롱을 드높이>.
가로등 만드는 회사의 직원이었던, 나이는 마흔 둘인, 아들이 둘 있는, 우울한 \"전반\"을 접고 화려한 \"후반\"을 꿈꾸는(혹은 훨씬 전에 이미 후반을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떨어질 데까지 굴러떨어진, 어쩔 수 없는, 가슴 속 깊은 데서 피리새 소리가 들리는, 나지도 않은 소리가 들리거나 있지도 않은 것이 보이거나 하는(그래서 정신 이상자라고 말을 듣기도 하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마무사의 환영이 끊임없이 출몰하는, 어떤 사내의 이야기.
이 소설을 읽고, 어디까지가 '전반'이고 어디서부터가 '후반'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생의 반환점이란 게 그렇게 '나이'로 결정지어지는 것이던가요. 가령, 열여덟 더벅머리 사춘기 소년에게도 '이제부터 내 삶의 후반이 시작되는 거야.'라는 느낌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 말하자면, 자기 삶이 계속 부정적으로 느껴질수록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꿈꾸는 정도는 커지는 것이고, 그런 욕구가 뚜렷해지는 그때가 생의 전반과 후반이 갈리는 때가 아니던가요. 그런 점에서 보면, 어쩌면 우리 삶은 한 개의 전반과 한 개의 후반이 아니라 몇 개의 전반'들'과 다시 몇 개의 후반'들'로 구성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지도 않은 소리가 들리거나 있지도 않은 것이 보이거나 하면……환자\"라는 구절이 있더군요. 나는 그 '환자'라는 글자 위에 조심스레 두 줄을 긋고 이렇게 씁니다. 느낌표 두 개까지 꽉 찍어서, 이렇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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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점이 좋아서 그렇게 힘들게 구해 준 책인가 생각해 봅니다. 알 것 같기도 하다가,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요즈음 내가 아주아주 많이 좋아하게 된 시 하나 적어 보겠습니다. 기형도의 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입니다.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 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 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 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