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중요한 일정을 대충 마치고 나면 대개 처가집
에 가게 됩니다. 저의 처가는 지방소도시 종합경기장 옆
가파른 언덕에 있어서 그곳을 ㅈㅣ날 ㄷ대마다 검투사들
이 칼과 창으로 싸우다가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즈음 황
제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사살 여부를 종용하는 장면
을 연상하곤 합니다.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때로는 지붕
쪽 계단으로 올라가 생중계되는 야구경기를 공짜로 보기
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눈과 추위로 비탈길에서 계속 미
끄러졌습니다. 후진하는데도 차가 큰 다라이 속에서 헤엄
치는 물방게처럼 비틀거립니다. 이때 좋은 생각이 났습니
다. 제 차가 낡고 단종된 차이기는 해도 4륜구동차라는 사
실이. 주먹같이 생긴 뭉툭한 기어를 디귿자로 휘둘러 4L
에 갖다놓자마자 차는 결심한 듯 꿋꿋하게 언덕 위 목표
지점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속는 거지만 '닷새 연휴 영화나 실컷 볼거나'라
는 프로그램을 뒤적거리며 방안을 뒹굴거려 보지만 볼만
한 영화는 공중파 방송에서 좀처럼 보내주지 않습니다.
음악성 없는 노래를 시끄러운 백사운드에 섞어 억지로
벌이는 잔치를 보고 들어야만 합니다. 성당음악에서부터
비롯되어 역사깊게 발전한 중후한 클래식 음악의 연주
실황도 녹화했다가 케이블방송에서 종종 틀어주더니만
소문난 잔치에선 국물도 없는 모양입니다.
뒹굴거리다가 팔벼개로 괴었던 양쪽 팔꿈치가 저릴 때
쯤 저는 '동키호테'라는 별명을 가진 친척 아저씨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종합경기장에서 약 60킬로 떨
어진 광능내 "팔야촌" 이라는 통나무집 레스토랑으로 찾
아오라는 기별이었습니다.
유리창으로 광릉의 설경과 햇볕이 비쳐드는 벽난로 앞
통나무 테이블에서 포도주와 바베큐돼지를 먹는 중
에 '기인奇人 아저씨'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호랑이에게 쫓기다가 우물을 발견하고 두
레박을 맨 밧줄에 매달려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내려가
면서 보니까 바닥에는 독사 다섯 마리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도루 올라가자니 호랑
이가 기다리고 있고 바닥에 내려설 수도 없어 중간 쯤 위
치에서 호랑이가 포기하고 가기만을 기다리며 우물벽 돌
출부에 살짝 발을 걸치고 있으려는데 이 불행한 사내에
게 또 하나의 재앙이 닥쳤으니 그건 다름아닌 생쥐 두 마
리가 나타나 밧줄을 갉아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가히 촌철살인寸鐵殺人 이라고 할 만한 이 식은땀나는
상황을 어떻게 헤쳐가야 하는가에 대한 해결방식은 세
가지라고 합니다.-그 방식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김서방. 해답 세 가지는 다음 주에 식사를 사면 그때
알려줄께."
--- 여기서 그간 관심있게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세가지 풀이를 말씀드립니다.
며칠 후 서초동의 유명한 우렁된장집에서 저는 답을 듣기 위해 그 문제
를 낸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식당 안은 붐비고 입천장을 델 만큼 뜨거운 뚝배기가 나
왔습니다.
"답이 뭡니까?"
식사를 시작하면서 기인(奇人)은 말합니다.
"맨처음 간단히 떠올릴 수 있는 풀이는 우선 체념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니, 그럼 죽음을?"
"그렇지, 풀이라니까 무조건 '007 두번 산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만 체념도 하나의 훌륭한 답이야. 나는 자살예
찬론자는 아니지만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인 사람 중에
우리가 존경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체념'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우리네 살며 부딪히는
문제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상당 부분 이 '체념'이란 방식
에 의해 풀리게 되지. 예를 들자면 실망스런 남편을 만
나 결혼에 대해 환멸을 느껴 후회의 감정에 빠져서 급기
야 우울증까지 앓게 된 한 여성이 몇년 뒤에는 자기애한
테 바이올린, 구연동화, 스케이트 등을 가르치고 자기도
아침에 수영하고 사업도 열심히 펼치는 등 삶을 향한 불
타는 의지를 보여주는 긍정적 스타일로 변했더란 말이
지, 이런 경우를 나는 주변에서 종종 봐왔어. 그런 경
우 '체념'이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변하여 삶의 현실과
멋지게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연결시켜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는'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혹자는 말하길 빨리 뛰어올라가 쥐
만 잡아죽이면 된다고들 하던데요."
"그렇지. '밧줄을 타고 올라가서 생쥐를 잡는다.' 이것
도 하나의 해결방식임에는 틀림없어. 그치만 현실적으로
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만큼이나 어려운 얘기일세. 이
론과 실제는 언제나 차이가 나게 마련이거든. 왜냐하면
동굴의 깊이를 약 10M로 보고 사내가 매달린 중간 지점
을 약 5M라고 봐. 올라가는 동안 8가닥을 꼬아 만든 밧
줄에서 일곱 가닥 정도는 앞니가 늘 근질근질한 생쥐 두
놈이 순식간에 갉아먹어 버릴 테고, 우물 벽은 잔뜩 물이
끼가 끼어있어. 미끄러운 벽을 필사적으로 올라가는 그
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밧줄이 좌우로 크게 요동을 치는
데 그 남은 한가닥 가지고 건장한 사내의 체중을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칫하면 줄이 끊어
져 독사의 공격을 받기도 전에 추락사한다고 봐야지."
"그래도 무언가는 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자네 말 잘했네. '벼랑끝 개구리가 나를 깨우
네'라는 그림 혹시 본 적 있나. 황새가 개구리를 덥석 물
어 대가리부터 통째로 삼키려는 순간 개구리가 앞발을
뻗어 황새의 목을 향해 버팅기고 있는 그림인데 아 그
참 대단해. 인간이 그 개구리보담은 나야지."
"그럼 도대체 정답에 가까운 풀이는 뭡니까?"
"내가 그때도 호접몽 얘기를 했지만 그 뭐냐 그 장자가
꿈 속에서 호랑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노니다가 잠깨어
보니 배가 산만한 쭈글탱이 노인이 낮잠을 자고 있더란
얘기야. 그래서 꿈속의 나비가 자신인지, 이 노인이 자기
인지 통 알 수가 없더란 얘기야. 그러니 이 상황도 꿈과
같으니 거기서 깨어나면 되는 거지."
저는 언론의 유희 같은 이 궤변론자의 이런 예상 밖의
답변을 들으면서 한편으론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 아득
히 어지러워져서 더이상 할 말도 없고 후후, 불면서 뜨거
운 된장뚝배기를 묵묵히 떠먹는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