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과 망각 사이 * / 안재동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누구한테서든 참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다.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을 쉬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학교에서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가령, 세계사 연대표를 단번에 외워버리는 사람과 수십 번 반복해서 외워도 잘 외워지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랄까.
명문대학으로 진학했거나 국외 유학을 가서 박사 학위를 땄거나 사법시험을 비롯해 각종 어려운
고시를 통과한 사람은 아마 기억력 하난 엄청나게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런 만큼, 사람에겐
축복이라도 기억력 좋은 것만 한 축복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 특별한 기억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예능이나 체능 혹은 사업 관련의 돈벌이 등 다른 쪽으로
특히 발달 되어 있다고도 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소위 인텔리 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대개 개인의
탁월한 기억력이 자신의 입지 구축에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탁월한 기억력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살다 보면, 머릿속에 든 무엇을 제발 좀
잊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다시는 생각 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걸 싹 잊어버리도록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나아가 그로 인한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져 버려 적지 않게 고생하기도 한다.
때론 일시적으로라도 기분 나쁜 일 또는 슬픈 일 그도 아니면 괴로운 일이 자신에게 생길 수 있고,
그 크기나 무게가 크든 작든 그것을 가능한 한 빨리 싹 잊어버리기 위해 몸부림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쉬 망각이 안 되니까 술독에 아주 빠져 지내다시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성격이 광폭하게 변하거나 숫제 머리가 돌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도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본다면 사람이 무엇을 쉽게 망각해버리는 경우 또한 축복이 아닐 수 없겠다.
그러나 망각도 적당해야지 그것이 지나쳐도 큰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병적인 망각
현상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은가. 치매도 그 중의 하나인 셈이지만, 노인성
치매든 일상성 망각증상이든 아무튼 망각도 지나치면 탈이다. 따라서, 기억력이 탁월하다 해서
그다지 부러워만 할 일도 아니겠지만, 지나친 망각 증상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겠다.
그처럼 사람이 한평생 탁월한 기억력까진 고사하고 병적인 망각 증세에 빠지지만 않아도 행복하
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 터이나 사람 일이 다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