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나무 (2019.05.22 AM 04:40)
사계절이 무던히도 지나가는 곳에
앙상한 가지와 굽어진 허리를 지닌
사철나무가 있다.
차가운 방울의 방문과
눈부신 빛살의 보살핌으로
흙무더기를 헤치고
곧게 일어섰을 나무가.
때론 강인하고 쓰디쓴 해풍에 휩쓸리면
잠시만 비켜섰고
때론 빛과 구름의 만남이 엇갈려 목마르고 굶주리면
잠시만 가지를 털어낼 뿐이면 된다는
높다란 벼랑 끝 바위만이 곁에
보이는 전부였던 앙상해진 나무가.
거짓말이 가득하고 약속을 깨부수는 것이
딱딱하게 굳어진 아집이
작은 불씨가 되어
저 멀리서 물 끓듯 다가올 때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 검게 타고
재로 화해서야 보였다.
풀섶을 헤치고 만났던 바위 같은 돌멩이
벼랑 끝 그늘을 잡아준 눈물 많은 소나무
해와 구름의 사이가 벌어진 때 찾아오던
붉은 피를 지닌 털북숭이 들
고고한 척, 저 먼 곳에
항상, 언제나, 푸르던 녹음이
검붉은 매캐한 것에 허리를 베이고
뿌리 끝에 불꽃이 번져 타고 오를 때서야
마른하늘의 번개에 절명한 고목의 한숨이
우매함을 지적하며 들려온다.
번갯불에 타오르는 고목이
앙상한 나무에게 더없이 아름답고 희망과도 같다는
읊조림에 대한 대답으로.
모든 색이 검은 재로 덮여 물든 때
풀 한 포기라도 피어오르기를 바라는 것은
앙상한 흔적이 된 나무의 몽상과도 같은 바람일까.
-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