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앞서 집으로 향한 자가 있어, 나보다 앞서 길을 잃었다. 헤매는 걸음 내내 머뭇거리다가 멈추어선 길 위에서 그와 마주쳤다.
"언제나 다니던 길이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참 난감하다. "
"그러게. 이쯤에 놀이터가 있었는데, 없어졌어. 얼마 전까지 삐걱대던 그네가 여기 있었는데."
"그런가? 흠, 그네가 아니라 정글짐이 있던 자리 같은데."
당황스러운 눈빛이 오고 가고, 틀림없이 길을 잃은 그와 내가 한동안 말 없이 서 있었다.
어둠이 내리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는데, 이 훤한 세상에서 다 큰 어른 둘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
타박타박타박. 멈춤. 낡은 곰인형을 안은 여자 아이가 우리 앞에 멈추어섰다.
"뭐 하세요?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으로."
길을 잃은 우리의 표정이 상처투성이라는 건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어."
"그래요? 집이 어딘데요?"
아, 내 집이 어디더라.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할 말을 잃는다. 그는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 건가. 흘낏 쳐다보니 그 역시 입을 꼭 닫고 서 있다.
"이 곳은 참 재미있는 장소예요. 언제나 한두 명의 어른은 길을 잃어요. 애들은 그러지 않는데. 어른들은 기억력이 나쁜가봐요. 자신이 왔던 곳을 모르다니."
타박타박타박. 곰인형을 안은 여자 아이가 제 갈 길을 따라 서슴없이 사라져갔다. 찬찬한 걸음. 그 아이는 아직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그렇게 부러운 표정 짓지 마. 우리도 어쩌면 저 나이 때에는 우리가 왔던 곳과 우리가 갈 곳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잖아."
그가 말했다. 위로라고 던진 말 같은데 참 쓸쓸하게 들린다.
"어른이 된다는 건, 길을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게 어떻게 어른이라는 거야."
아직은 밝은 거리. 시궁창 쥐 한 마리가 앞 뒤를 살피더니 뽀르르 쥐구멍으로 잽싸게 들어간다.
"아, 허탈해. 저 녀석까지도 제 집을 알고 있어."
타박타박타박. 멈춤. 반백의 여자. 현명한 표정. 차분한 말투. 말을 한다.
"저를 따라오세요. 길을 잃었나본데, 제 집에서 쉬시면서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아직도 밝은 거리. 아무래도 지금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정중하게 사양하려는데, 나보다 앞서 길을 잃은 그가 말했다.
"마침 지쳐있었는데, 감사합니다. 저는 그 호의를 받아들일게요."
그와 반백의 여인이 사라지고, 나는 길 위에 홀로 서서 아주 잠시 후회를 해 본다.
'이제 날이 저물텐데, 그냥 따라간다고 할 걸 그랬나. 어두워지면 집을 찾기 더 어려울 텐데.'
방향을 잃은 길 위에서 두 마리의 고양이와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와 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와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아가씨와 서류뭉치를 땅에 떨어뜨린 청년과 독서실로 향한다는 중학생과 친구와 술 약속이 있다는 아저씨와 늦은 저녁장을 봐 오는 아주머니와 바람이 쉬고 있는 늙은 소나무와 물풀이 산다는 개울물과 시력이 나쁜 개구리를 보았다.
타박타박타박. 멈춤. 곰인형을 든 여자아이.
"어라? 아직 안 갔어요? 아까보다 한참 지났는데, 여기서 뭐하세요? "
치과에 다녀온다는 여자아이는 지금 치열 교정중이라고 한다. 가만 놔두면 드라큐라 이빨이 된다는 아이. 어릴 때부터 잘 잡아주면 이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다고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단다.
"그래, 어디로 가야할 지는 알았어요? 어디 사는지 말이에요."
그러고보니 아직 아는 게 없다. 생각도 나지 않고.
"아닌가보다. 생각이 나지 않네."
"그럼 현이 아주머니를 따라가지 그랬어요. 지금까지 헤맸다면 틀림없이 만났을 텐데. 그 분이 휴식을 주었을 거예요. "
"만나기는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어. 그 때 포기하기에는 햇살이 너무 아까웠거든."
"그래요.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사실 저도 따라가진 않았을 거 같아요. 길은 남이 알려줄 수는 있지만 제가 찾아야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까요."
이제는 집으로 가서 코~ 하고 잘거라는 곰인형을 든 여자 아이가 사라지고 거리에 어둠이 자욱해졌다.
방향을 잃은 내가 길 위에 서 있다. 이미 어두워졌고 깜깜한 속을 헤매기에 앞서 잠시 주저앉아보았다. 저녁바람이 제법 차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살갗을 파고들어 올 것이 틀림없다.
어른이 된다는 건 방향을 잃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일까. 그렇지 않다. 홀로 서야 하는 어른은 언제나 길을 모른다. 누구도 그 앞을 비춰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길을 잃고 헤매는 건 가치없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헤매는 과정 속에 인생이라는 게 있다. 목표가 있어 단번에 그곳까지 가는 자가 있다. 99%는 부럽지만 1%는 부럽지 않다. 그는 적어도 '머뭇거림의 미학'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길을 잃었고, 내가 가야 할 곳과 그곳으로 가는 방법을 알지 못 한다. 찾을 수도 있갰지만 어쩌면 영원히 찾지 못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나는 1%의 미학 속에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처럼 들리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가. 주저앉아 신세한탄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어둠 속에서도 나는 이내 일어나 길을 찾아 볼 것이고, 몇 번이고 잘 못 들어선 길은 어느 순간 가지 않아도 됨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현이 아주머니 같은 분이 나타나 휴식을 권할 것이고, 지친 어느 순간에 잠시의 쉼을 청할 것이다.
이제 어둠이다. 도시에는 가로등이 있고, 산촌에는 별빛이 가득이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치지 않고 헤매다보면 불현듯 대답이 생각날 것이다. 길은 걸으려하는 자에게 언제나 열려있다.
peace and happy ...........v
------> 동화 한 편 다 써 놓았었는데, 날렸습니다. 쩝.
가끔은 이 불안정한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 쩝.
팔자려니 하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