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떠나간 마을에 한여름 햇살과 후텁한 바람과 거리를 떠도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남았다. 빈 거리에 때로 차량이 몇 대씩 - 결코 정차하지 않고 - 지나갔고, 때로 교회의 종소리가 '뎅뎅'거렸다. 바로 어제까지 소란하였던 마을에 마치 독한 열병이 휩쓸고 지나간 듯, 살아숨쉬는 모든 것은 이곳을 빠져나갔다.
"참, 재밌어. 그렇게 개성이니 자유니를 외치는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한 날 한 시에 '쏙'하고 마을을 떠나다니 말이야."
"한 여름 햇살이 따갑다잖아. 날이 더운데 별 수 있어? 더위를 느끼는 건 다 같은가봐."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하다. 슬퍼지려고 해. 살아움직이는 게 저 고양이 한 마리 뿐이라니. "
햇살과 바람이 마을 공터에 머물며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무 그늘조차 없어서 공터는 한 발 내딛기도 어려울 만큼 바삭바삭이었다.
"이봐, 햇살. 옆으로 조금만 비켜주면 안 돼? 내가 도저히 그 쪽으로 갈 수가 없잖아. 심하게 따꼼따꼼거려서 이 자그마한 나무 그늘에서 움직일 수가 없어. 내가 운동 부족으로 뱃살 늘어지면 네가 책임질거야?"
고양이가 할딱거리며 공터의 햇살에게 말했다.
"흠, 그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노력해볼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내가 조금씩 왼편으로 가게 될거야. 내가 좀 더 빨리 움직이기를 원해? 그럼 네가 지구를 좀 빨리 돌려. 푸하하."
"얘가 제풀에 더위를 먹었나... 왜 그래?"
바람이 '푸푸'하고 불어 햇살을 조금 옆으로 제껴놓았다.
"딸랑 우리 셋 뿐인데 두루두루 사이좋게 지내자. 이봐, 떠돌이 고양이. 너도 이리 와."
고양이가 타박타박 공터 쪽으로 갔다. 발바닥에 감기는 모래알이 하나하나 불덩이였다. 너무 뜨거워서 소름이 돋았다.
햇살과 바람과 고양이 한 마리는 모래만이 가득한 공터에서 참 심심하였다.
"으아~. 뭐 재밌는 일 없을까?"
"그러게. 우리는 참 심심한데, 덜 심심해질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아, 더워...... 말 하지마. 더 더워."
공터에서 바라본 마을. 저기 하얀 속고쟁이가 걸린 집은 면장님의 어머니가 사는 곳. 비 오면 어쩌려고 빨래를 걷지 않고 가셨을까. 붉은 지붕 위에 흰 꽃이 인상적인 저 집은 초등학생 순이의 집. 어떻게 지붕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가 있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이런이런 그 총각 또 정신이 없었군.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몇 날 며칠 집을 비우겠다니. 공부를 헛 한 게야. 버섯을 재배하는 황 아저씨네 순돌이 밥그릇은 왜 마당에서 뒹굴고 있는거지? 고 녀석에겐 밥그릇이 생명인데 말이야. 아유, 역시 철이네 엄마는 손끝도 야물어. 장독도 꼭꼭 덮어놓고, 마당에 그 흔한 빗자루 하나도 안 보이게 해 놓았군. 같은 뚜껑덮인 장독인데, 철이 엄마가 덮은 건 표가 난다니까.
마을은 여전히 비어있고, 햇살과 바람과 고양이는 여전히 심심했다.
"나만 보면 아릉아릉거리던 문방구 집 털복숭이까지 보고 싶어. "
고양이가 게으른 눈을 뜨고 얘기했다. 그 때, 저 먼 하늘에서 먹구름이 살금살금 밀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먼저 발견한 바람이 물었다.
"이봐, 설마 이 쪽으로 오는 건 아니지? 일기 예보에 그런 건 없었잖아."
"이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한 여름 날씨는 햇살인 나도 모를 만큼 변덕인 거야. 쩝. 뭐, 이제 좀 시원해지겠지. 한 바탕 소나기라도 내리면 말이야."
"소나기라고? 그럼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무슨 말이야?"
"마을을 우리가 지켜야지."
햇살과 바람과 고양이는 순간 마음이 통했다. 공터에서 여름 한 때를 같이 지냈기 때문이리라.
"서둘러."
햇살과 바람과 고양이는 잽싸게 마을 쪽으로 내달렸다. 먹구름이 더 가까이 다가 오기 전에.
"할머니의 속고쟁이, 이거 어떻게 하지?"
"내가 점프해서 바닥에 떨어뜨릴 테니까 바람이 네가 저 고시생 방으로 날려. "
고양이가 빨래줄을 향해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데.. 도저히 발이 닿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빨래 버팀목을 공략할 수밖에. 고양이는 빨래줄을 왈칵 쓰러뜨렸다. 그리고 빨래집게를 물어뜯어 고장내고 할머니의 속고쟁이를 구해냈다. (^^v) 바람은 그 옷을 날려서 고시 총각의 열린 창으로 밀어넣었다.
"아, 다음은 순돌이 밥그릇. 이건 어쩌지?"
"그것도 밀어 넣자. "
"속고쟁이에 떨어지면 어떻게 해."
"여름 햇살. 저 방을 비춰봐. 밥그릇을 다른 쪽으로 보내게 말이야."
햇살의 도움으로 순돌이 밥그릇은 고시생 책 위로 왈칵 떨어졌다. 밥풀 몇이 책 사이로 후두둑거렸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아, 순이네 흰 꽃. 이건 비 오면 쓰러질 텐데 어쩌지? "
"얘도 보내자. 저 방으로. 사이좋게 ^^"
이렇게 해서 흙 한 줌과 함께 흰꽃도 방으로 날려보내졌다. 지붕에서도 살았는데, 방에서 못살까라는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우와, 먹구름이 코 앞이야. 난 이제 가 봐야 해. 먹구름과 싸워서 이길 수가 없어. 안녕."
햇살이 인사를 남기고 휘리릭 사라졌다. 이제 마을에는 덜 후텁한 바람과 고양이 한 마리와 다가오는 먹장 구름 뿐이었다.
"이제 나도 사라지고 좀 찹찹하고 거센 바람이 올 거야. 넌 어떻게 할래?"
바람이 물었다.
"나도 저 방으로 들어가 있을래. 비 맞기 싫어."
그리고 드디어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내렸다. 고양이는 폴짝 고시생 방으로 뛰어들어갔고, 후텁한 바람도 흩어졌다. 마을은... 이제 빗소리만 가득이었다. 창이 열린 방에서 고양이는 고쟁이와 밥그릇과 흰꽃을 구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먹구름 뒤에 숨은 햇살도 멀리 밀려간 후텁한 바람도 사뭇 흐뭇했다. 며칠 후면 돌아올 사람들은 이 난장판을 보고 뭐라고 할까. 제일 깜짝 놀랄 이는 누구일까? 고시생은 어쩌면 기절할 지도 모르겠다. 이 일을 예상하는지 못 하는지 고양이는 즐거운 꿈에 젖어 있다. 꿈 속에서 자신은 아주 멋지게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 peace ....and...... happy .........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