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 생각 없었어. 그런데 엄마 아빠가 낳아 놓았잖아. 그러니까 책임져.
배고파. 밥 줘. 기저귀가 축축해. 보송한 걸로 갈아줘. 모기가 물어. 잡아줘. 더워. 부채 부쳐야지. 추워. 난방은 한 거야? 엄머 아빠 책임이잖아. 내가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조성해 놓아야 할 거 아니야.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다투지 마. 가구가 낡았잖아. 옆집 영수네 가구보다는 더 좋은 걸로 들여놔. 아니면 쪽팔려. 들었어? 옆집에서 천만 원 하는 페르시안 고양이를 샀대잖아. 당장 사 와. 내가 끼고 앉아 우아하게 텔레비전을 보면 근사할거야.
알아? 107동에 사는 순구는 엄마가 돈 써서 내신 올려놓았대. 엄만 뭐했어? 우리집엔 어떻게 10억이 없어? 그 돈 있으면 명문 대학에 잔디 깔아주고 들어갈 수 있대잖아. 우린 왜 이렇게 가난한거야? 왜 내가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데. 부모가 부자면 이런거 안 해도 되잖아.
결혼, 귀찮아서 안 해. 내 인생을 완전히 책임져주는 엄마 아빠가 있는데, 그 힘든 걸 왜 하겠어. 나보다 오래 살아. 낳아 놓았으니 끝까지 책임져야지. 안 그래?
때로 자식이라는 이름의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
"그런 것도 못 해 줄거면 왜 낳아놓았어!"
부모는 채무자가 아니다. 자식이 채권자는 더더욱 아니다. 어떤 존재도 그런 것을 부여할 수 없다. 어떤 존재도 그런 '권리'를 부여받을 수 없다. 만약 부채 의식을 가진 부모가 있다면 그건 착각이다. 만약 채권 의식을 가진 자식이 있다면 그건 더 큰 착각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논리적 근거도 없이 이러한 관계를 용인하고, 인내하기도 한다.
불가에서는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죄 갚음 혹은 빚 갚음으로 풀기도 한다. 사람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전생과 전전생과 그 전전전 전생. 이렇게 하염없이 거슬러올라가다보면 아무 것도 아닌 아무 것이 나올텐데, 그 때부터 어떤 업을 누구의 의지로 쌓아왔다는 것인가. 부모와 자식이든 아니면 생명을 가진 어느 누구이든 그저 생명이며 인격체일 뿐 누가 누구의 채권자이니 채무자이니 은인이니 원수이니 하는 것은 단지 비유일 뿐 진리일 수는 없다. 우리는 비유를 체에 거르지 않고 통째로 꿀꺽 삼켜 제멋대로 소화도 못 시키고 있을 뿐이다.
자신을 채권자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착각이다. 그 누구도, 심지어 엄마와 아빠도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줄 의무는 없다. 그들은 혹은 그분들은 채무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인일 뿐이다. 그들에게도 삶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 미운 사람이 있는가.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도 넘쳐날 것이다. 자신이 소중한가. 다른 모든 것도 귀하고 소중하다.
난 엄마 아빠께 바라는 게 많았다. 불만도 많이 터뜨렸다. 그분들은 인내했다. 사실,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난 엄마 아빠께 해 드린 게 없다. 그분들은 괜찮다고 하셨다. 사실,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난 입만 열고 귀는 닫았다. 엄마 아빠는 입을 다물고 내 귀가 되어주셨다. 사실,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부모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그저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사랑이 많은 존재일 뿐이다.
부모는 현명한 인간이 아니다. 때로 어리석고 철없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알고 있는 최선의 것을 자식에게 제시해주고자 할 뿐이다. 그게 틀릴 수도 있지만 그건 그분들의 잘못이 아니다.
부모는 굳이 부자이거나 멋있을 필요는 없다. 지금 자신들의 자식에게 필요한 딱 그 모습 그대로 눈 앞에 계신 것이다. 그건 축복이다.
엄마 아빠의 자식인 나는 축복 받은 존재이며 지금에 와서야 그 사실을 아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이 축복을 누리게 해 주는 세월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