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실하게 살이 오른 녀석. 송송송송 요리하면 두 접시는 나올 게 틀림없다. 윤기 잘잘한 털빛이 아깝지만 털을 빼면 저 녀석은 그냥 먹잇감이다 . 아주 맛난. '
누구 얘기냐구? 당연히 흰 쥐 얘기다. 주인님이 기르는 모르모트, 흰 쥐 녀석.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어 지금은 접근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먹고 말테다. 짭짭. 입맛을 착착 다신 고양이는 창가에 앉아 털고르기를 시작했다. 하루도 거르는 법 없이 그저 내쳐 앉아 털 고르는 녀석. 뱃속을 가르면 흰 털 뭉치가 가득일거다. 꺼내서 공굴리기 하면 딱일텐데. 한 시간, 두 시간, 두 시간 반.. 흰 고양이 녀석의 털 고르기가 끝났다. 참 질서정연도 하다.
흰 쥐 녀석이 말을 걸어본다.
"이봐, 누가 봐줘? 허구헌날 털고르기 하고 있으면 상준대? 왜 시간을 낭비하고 그래?"
"야, 언젠가 나에게 잡아먹힐 흰 쥐! 나에게 있어 털고르기란 숨을 쉬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야. 고양이는 말이야, 우아함이 생명이란다. "
"이봐, 언젠가는 내가 잡아먹힐 지도 모를 고양아, 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창가에 앉아 털고르기 할 때가 제일 예쁘다. 가장 편안해보이기도 하고. "
흰 쥐 녀석이 고양이 볼 줄을 아는 거다. 넌 특별히 통째로 먹겠다. 안 아프게 말이야.
"넌 맨날 맛난 음식 먹으면서 굳이 나 같은 쥐를 먹겠다는 이유가 뭐냐?"
"그건, 고양이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거야. 쥐를 잡는 건 고양이의 본분이거든. "
"그럼, 그 본분이라는 것, 언제 지켜봤니?"
흰쥐 녀석이 핵심을 묻고 있다. 쩝. 이 집 밖에서 식사를 해 본 적이 없는 고양이. 쫌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한다.
"아직은 없어. 넌 내 첫번째 먹이가 될거야. 본분을 지키게 해 줄 먹이."
"나름대로 영광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냥 천수를 누리고 싶다. 냅둬라. "
유리 안이 안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걸 아는 흰 쥐 녀석은 사실 이 실험실에서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실험용으로 이용당하다가 덧없이 사라질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
"흠, 천수라구? 네 소원은 그거냐? 내가 그걸 도와주면 너는 내 먹이가 될거야?"
"말이 안돼지. 진정한 고양이는 죽은 쥐는 먹지 않아. 그런데, 내가 천수를 누리려면 내가 죽지 않아야 하는데 그건 어떡하려고 그래?"
역시 다시 핵심을 찌르는 질문. 유리 상자 안에서 공부만 했나 보다.
"그건 뭐, 고민해보자. 쩝."
주인님이 들어왔다. 보들한 털을 한 번 쓰다듬더니 모르모트 쪽으로 간다.
"오후 늦게 실험할 테니까 기다려."
그런 중요한 일을 저렇게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고, 사람좋은 표정으로 나간다. 모르모트 녀석, 고양이에게 먹히기 전에 주인님 실험도구로 죽겠구나.
흰 쥐 녀석이 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어쩌라고...?'
"내 소원이 천수를 누리는 거야. 쥐는 원래 오래 살지도 못 해.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내 먹이가 되지도 않을 너를 왜 도와주니?"
"생명을 살리는 건 중요한 일이야. 네가 본분이라고 주장하는 고양이의 먹이 쥐- 라는 것은 단지 말장난일 뿐이지. 배 고프지 않은데, 생명을 해하는 건 죄악이야.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도 죄악이야. "
흰쥐가 간절하게 말했다. 고양이의 마음이 조금 움직이려했다.
"그걸 누가 정했는데?"
"우리가. 생명을 가진 우리 모두가 정한거야. 단지 욕심에 눈 먼 일부 생명체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야."
"그런 걸 나도 모르게 언제 정했어?"
"너도 알고 있어. 태초에 우리가 그렇게 합의한 거니까. 너도 단지 잊어버렸을 뿐이야."
사실 굳이 이 녀석에게 암세포 전이 실험을 하지 않아도 주인님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고양이 자신이 흰쥐 녀석을 도와줘도 되는 거다.
"이 실험실 보안이 철저해. 어떻게 나갈건데?"
고양이가 물었다 .
"먼저 날 이 유리에서 꺼내줘. 오른쪽 파란색 단추를 누르면 유리 뚜껑이 저절로 열려. "
"그 다음엔?"
"네가 나를 통째로 삼켜. 씹지 말고, 그냥 통째로 꿀꺽. 네 뱃속에 들어가 있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 네가 날 토해내면 되잖아."
흠, 몇 분 후, 고양이가 갑자기 통통 살이 쪘다. 뱃살만 자안뜩. 실험실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산책 나가듯이 어슬렁거리며 나갔다.
"이봐, 고양이. 안 본 새 많이 쪘다. 다이어트 해야 하겠는데."
직원이 놀렸다. 무시하고 여유있게 실험실을 빠져 나왔다. 다시 몇 분 후, 호들갑스러운 직원들의 외침이 들렸다. 흰쥐 실종 소동이겠다.
공터에 흰쥐 녀석을 토해놓고 나서 고양이가 말했다.
"난 고양이의 본분을 다 한 거야. 어쨌든 쥐를 먹었잖아. 소화시키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니 이제 너는 네 소원대로 천수를 누려라."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실험실로 돌아갔다. 갑자기 홀쪽해진 배로 말이다.
"이봐, 고마뭐. 그런데 가는 길에 배에 물이라도 채워가라. 의심받겠다."
이렇게 말하고 흰쥐 녀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수라는 걸 누리러 가는 걸 것이다. 짜식, 말이라도 잘 하니까 살아남은 거다. 고양이 녀석이 지나치게 착한 걸까. 뭐, 친절한 고양이 한 마리쯤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