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TIME에 실린 글입니다..(가지고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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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가 죄절감을 느낀 사람들은
이런 일에 위안을 얻을 수 잇을 법하다.
즉, 김정일 정권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은 외국인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기까지 30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71년 23세였던 팜 녹 칸은 베트남 교환학생 신분으로 평양에 머물고 있엇다.
평양에서 그는 북한 공장 노동자인 24세의 리영희와 사랑에 빠졌다.
두 나라 정부는 서로 마음맞는 공산주의 사이였지만 두나라 다 외국인과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시켰다. 칸은 "가능성이 없었다"고 말한다.
칸이 1973년 평양을 떠나게 되면서 두 사람의 마음은 참담해졌다.
그로부터 1년 뒤 리영희는 어느 베트남 교환학생에게 편지 한 통을 칸에게 몰래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식으로 30년에 걸쳐 서로 은밀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1978년과 1982년에
칸이 북한을 방문한 베트남 사절단의 통역으로 따라오면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는 1992년부터 리영희를 위해 북한 대사관을 찾아가 호소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의 증표로 누렇게 바래가는 40통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
그는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리를, 나중에는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로부터 계속 편지를 받았다.
칸은 지난 해 전직 외교관인 아버지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트란 둑 루옹 베트남 국가주석이 자신을 변호해ㅐ 주도록 설득했다.
이런 노력이 주효해 리영희는 북한 출국 허가를 받았고,
두 사람은 지난달 하노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칸은 "그녀가 아직도 아름답다"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는 자신이 얻은 크나큰 행복을,
북한이 변화하고 있다는 징조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리영희는 생각이 다르다.
"이런 행복을 얻은 것은 오로지 내 연인의 엄청난 노력 때문이었다."
참된 사랑은 외교활동처럼 때로는 엄청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번역:홍수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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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
누구도, 무엇도 감히 그 앞을 가로막지 못하는가봐요.
리영희씨의 말이 맞아요. 이 사랑은 엄청난 연인의 사랑과 노력때문에 결실을 맺은 거에요~
사랑은 이렇거구나.... 생각하게 해주어 여기에 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