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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시모음> 이해인의 '봉숭아' 외

     날짜 : 2014년 08월 13일 (수) 0:08:15 오전     조회 : 2287      

<봉숭아 시모음> 이해인의 '봉숭아' 외

+ 봉숭아  

한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봉숭아 꽃

보여줄까 말까?
터뜨릴까 말까?

손톱 밑 반달이 보고 있어

그래 좋다
빨간색 커튼 가리자

톡 톡 톡
사랑이 익는 소리  
(배종대·시인)


+ 봉숭아

너 여태껏
거기 있었구나
울퉁불퉁 토담 길
모두 시멘트로 바뀌고
다 사라진 줄 알았더니
갈라진 벽돌 틈새
용케도 뿌리를 내렸구나
손가락마다 빨갛게 동여매고
종일 담 밑에 웅크려 있던 순이는
LA로 이민 가서 소식조차 없는데
그녀가 버리고 떠난
그 앙증맞던 빨간 손톱만
여태껏
거기 남아 있었구나
(정소슬·시인, 1957-)


+ 봉숭아 꽃물

아홉 살 돌팔매가 잔별로 뜬 새벽 두 시
모닥불 약쑥 연기 진양조로 흔들리면
제풀에 불콰해졌지,
꽃잎파리 싸맨 손톱

손톱이며 가슴까지 으깬 꽃잎 동여매고
초경보다 더 붉게,
붉게 젖어 타던 속내

어머니
혼불 지피셨지

손가락 끝 끝마다
(박해성·시인, 1947-)


+ 봉숭아

뜨거운 햇살이
심장까지 내리찔러
등골에까지 땀 흐르는
한여름 날

사랑의 열기를 견디다 못해
순결한 처녀가
초경을 하듯
꽃잎을 피우더니
붉은 꽃잎에 꽃잎을 더하여
피어나고 있다

아직도 한번도
사랑을 못해 본
수줍은 계집아이 손톱을
빨갛게 물들여 놓는다

해맑게 웃는 웃음을
손으로 가리는 계집아이에게

순결은
사랑하는 이에게
단 한번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봉숭아 황홀한 꿈

여름 내내 너에게 가 스미고 싶은 마음이
태양 아래 막무가내 출렁이던 것을 아느냐
밤마다 너에게 가 닿는 황홀한 꿈,
서늘한 네 사립문 밖에 서성이는 별을 아느냐
쏟아지는 별빛이 청천벽력같이 네 영혼을 열어젖히는 찰나
그 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붉은 선혈 뚝뚝 떨구듯
불 놓고 싶던 마음을 아느냐 정녕 그대는 아느냐
내 안에 붉디붉은 꽃 하나 피워 놓은 사람아
물들지 않은 사랑아
(이정자·시인)


+ 봉숭아

그 애를 기억하라고 한다면
봉숭아뿐이 안 떠오릅니다
손톱 끝의 빨간 봉숭아물
내 발끝에서 머리까지 온통 물들입니다
서양 매니큐어처럼 야하지도 않고
뭐랄까 그냥 옛날 우리나라
여자 이름 같은 것 있죠
그 애네 집은 유독
봉숭아가 참 많이 피어 있던 것 같아요
낮에 나온 반달마저도
붉어지는 그 애네 집이었습니다
봉숭아, 자꾸만 마음에다 짓이기다 보면
그 애의 얼굴이 손톱 끝에 걸립니다
그 애에게 못 부친 편지는
봉숭아 밭에 가득입니다
손톱 끝을 풀고 그 애를 읽습니다.
(서수찬·시인, 1963-)


+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을 때

언제였던가
그 겨울, 첫눈 내리던 날.

뽀얀 얼굴의 널 만났을 때,
봉숭아 꽃물 들인 손톱이 다 지워지기 전에
첫눈이 내렸다며 넌 기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사랑은 분명 이루어져야 한다.
겨울 나무 위의 하늘처럼
늘 비어 있는 내게
너는 여름 잎사귀처럼
싱그럽게 다가와야 한다.
그 동안 못 다한 사랑을
죽을 때까지 가슴으로 나누며
이 도시에서의 가장 기쁜
연인이 되어야 한다.
(손종일·시인, 1965-)


+ 봉숭아

햇살 젖은 칠월
뒤뜰에 봉숭아 진한 붉은색으로
제비꽃 그림을 그린다.

댕기머리 외갓집 누나가
초롱불 밑에 발갛게
손톱 물들이고 동생이 옆에 앉아
칭얼거린다.

손가락마다 풀잎 싸서
하얀 실로 칭칭 동여매고
여름밤 조심스럽게 반딧불 따라
잠꾸러기 밤잠 설친다.

아. 그립다. 여름이다.
외할머니 여름밤 옛날얘기
아이 무서워라 도깨비얘기
한참 바라보던 겁쟁이 보름달은
슬금슬금 뒷걸음치고는 아 예.
숨어있었다.
(장수남·시인, 1943-)


+ 봉선화 꽃물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
더 이상은 감출 길 없어

이 밤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여요

한 올 한 올
정성껏 사랑을 수놓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아는 듯 모르는 듯

얄밉기 짝이 없는
무심한 당신이라 해도

내 손톱마다 홀연 피어난  
꽃들이야 알아보고

예쁘다 참 예쁘다
한 말씀은 해주시겠지요.

당신을 뜨겁게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연분홍 봉선화 꽃물로
수줍게 살짝 표하는 내 마음.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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